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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7.4남북공동성명, 그것은 기만이었다.

by anarchopists 2019. 12. 1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7/03 09:19]에 발행한 글입니다.


7.4남북공동성명, 그것은 기만이었다.

분단된 이 나라에 박정희 때 발표된 7.4남북공동성명(이하, 7.4성명)이 있고 김대중 때 발표된 6.15남북공동선언(이하 6.15선언)이 존재한다. 그러나 7.4성명과 6.15선언은 그 성립과정과 역사적 의미가 다르다. 그럼에도 일부 수구세력(특히 박근혜측)들이 7.4성명과 6.15선언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착각을 하고 있다. 하여 여기서는 7.4성명의 발표배경과 그 성격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한다.

1960년 친미반공독재자였던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악취가 나는 부정부패는 학생과 시민을 주체로 하는 4.19학생시민혁명(이하, 4.19혁명)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 한반도에는 통일론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그 가장 큰 요인이 혁신세력의 정치활동이 가능해진 데 있다. 혁신세력은 1960년 7.29 총선에서 참패를 교훈 삼아 남북이 통일되지 않고는 정치민주화와 자립경제를 이룰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남북통일론을 제기하였다. 혁신세력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운동의 실천방안으로 즉각적인 남북대표자회담 개최를 제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4.19혁명의 의지를 배반하고 권력 전면에 나선 장면 등 보수세력들은 남북교류 시기상조론만 거듭 주장하고 혁신세력의 요구를 지지부진 수용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혁신세력과 학생들이 주장되던 민주주의운동과 민족통일운동(평화통일론)은 비참하게 반공을 국시로 하는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1961)서 일체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한편 북의 김일성 권력은 4.19혁명 이후 한반도 남에서 민족통일운동이 제기되자, 그 동안 주장해 오던 ‘혁명적 통일론’에서 ‘지역적 혁명론’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내 두 정부의 공존을 인정하는 “남북연방제통일방안”을 제기하였다(1960.8.15) 이에 대하여 당시 박정희는 “북한의 남침위협”이라는 상투적 구호로 국민을 협박하면서 비열하게 인민혁명당사건(1964. 8)과 통일혁명당사건(1968. 8.24) 등을 조작하고 “빨갱이 몰이”를 시작하였다.

바로 이 시기, 미국은 닉슨 독트린(1969. 7.25, 주요 내용; 미국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체결된 조약은 준수하지만, 핵 위협을 제외하고는 아시아 각국은 스스로 협력하여 내란이나 침공에서 자국을 방위해야 한다.) 이후,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이룬다.(1972. 2) 그리고 ‘한반도 고착화 정책’을 쓰게 된다. 그러자 박정희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북과 접촉을 시도한다. 이 결과 남북적십자회담이 판문점에서 예비회담(1971. 9. 20)을 거쳐 1, 2차 본회의를 서울(1972. 8.29)과 평양(1972. 9.12)에서 각각 개최하게 된다.

그러나 남북적십자회담은 연막이었다
. 남북적십자화담을 대국민용으로 진행시키면서 막후에서는 남북의 불안한 독재권력들이 야비한 정치적 비밀접촉(1971. 11월부터)을 하고 있었다. 이 결과 북의 김영주와 남의 이후락 사이에 남북한간의 정치적 의견교환이 이루어졌다.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민족기만적’인 ‘7.4남북공동성명’(1972)이 그것이다. 그 내용을 잠시 보자. 첫째, 외세(外勢)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자주) 둘째,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평화) 셋째, 사상과 이념 및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민족대단결)

7.4성명은 이 밖에도 상호 중상비방(中傷誹謗)과 무력도발의 금지, 다방면에 걸친 교류 실시 등에 합의하고 이러한 합의사항의 추진과 남북 사이의 문제 해결, 그리고 통일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남북조절위원회(南北調節委員會)를 구성ㆍ운영하기로 하였다. 또 전쟁발발을 방지하기 위한 남북직통전화도 가설하였다. 이렇듯 민족분단 이후 처음으로 민족통일을 위한 바른 길, 곧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의 ‘평화통일 3원칙’이 제기된 듯 보인다.

그러나 7.4성명에는 남북의 두 분단권력이 정치적 비밀접촉을 통해 내면적으로는 한반도의 분단을 현실화하고 두 개의 조국을 전착시키려는 속셈이 숨어 있었다. 즉 남북의 독재권력들은 강대국의 전략인 ‘두 개의 한국’에 편승하여 그들의 불안한 독재체제를 안정시켜나가려 하였다. 그 결과 남한의 독재자 박정희와 북조선의 독재자 김일성이 각각 일인통치체제를 서로 인정하는 유신헌법(1972.10.17)과 사회주의헌법(1972.10.27)을 공포하였다. 유신헌법과 사회주의헌법은 각각 남북에서 박정희 독재권력 기반과 김일성 1인 통치체제를 강화하면서 전혀 이질적인 두 체제를 정착시켜 나가는 기틀이 되었다. 이것은 7·4 공동 성명이 밝힌 "이념·사상·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 하는 일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일이었다

이어 남북의 분단권력들은 쌍방간에 통일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대(對)국민선전을 위해 ‘남북조절위원회’를 개최하였다.(1973.6.12) 이어서 박정희와 김일성은 각각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과 <조국통일 5대강령>을 발표하였다. 박정희가 발표한 것이 이른바 ‘6.23선언’이다. 남의 6.23선언에는 평화통일 노력, 남북한 불간섭․불가침, 유엔총
회의 북한 초청 및 국제기구에의 남북한 동시가입 불반대, 이념이 다른 국가에 대한 문호개방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북의 5대 강령에는 군사문제 우선 해결, 정치․군사․외교․경제․문화 등 다방면의 합작․통일문제를 위한 대민족회의 소집, 남북연방제․단일회원국 유엔가입 등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곧, 당시 박정희와 김일성의 영토분단 고착의 의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결국 박정희가 일으키는 ‘김대중 납치 사건’(73년 8월)을 계기로 ‘남북조절위원회’ 개최가 중단되면서 7.4성명은 두 독재권력들의 ‘분단고착화’ 음모였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7.4성명의 음모가 탈로(?)나면서 남에서는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전민중적 궐기(민주화운동)가 열화와 같이 일어났다. 결국 박정희의 권력에 대한 끝 모르는 탐욕은 박정희 독재권력 내부의 모순에 의한 10.26사태(1979)를 맞아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북도 마찬가지다. 김일성도 권력의 내부 모순에 의하여 김영삼 정부와 남북정상회담을 앞에 두고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다(1994 7.8) 이렇듯 7.4성명은 겉으로는 민족통일을 내걸은 듯하지만 속으로는 당시 불안했던 두 분단권력들이 조국분단의 고착을 통한 분단적ㆍ독재적 권력을 영속화하려는 고도의 기만적ㆍ반통일적 정치술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일부 대권에 탐욕을 가진 수구세력들이 마치 6.15선언이 7.4성명에서 영향을 받고 그 정신의 계승인 양 말하고 다니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모독하는 처사이다.(2004.3월 처음 쓰고, 2011. 7.3 아침 다시 씀,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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