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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YH여공 김경숙과 85호 크레인 김진숙

by anarchopists 2019. 12. 1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7/1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YH여공 김경숙과
85호크레인의 김진숙


주변부 인생들은 벼랑 끝으로 몰기만 하면 대개 끝장을 낼 수 있었다. 천민자본주의와 이를 대변하는 권력의 사회문제 처리방식은 늘 그래왔다. 1970년대 말 YH여성노동자들이 마지막 기댈 수 있는 동아줄이 그나마 야당인 신민당사였다. 이때의 신민당은 당직자는 물론 당수까지 나서 갈 곳 없는 노동자들의 호소를 지켜주기 위해 당사를 침탈하려는 자들에 맞서 바리케이들 치고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신독재 하에서 야당의 존재 또한 주변부에 내 몰려 벼랑 끝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공감대가 깊게 깔려 있었으리라. 주변부 노동자들의 고통을 다 보듬지 못하지만 유일한 보호처로 야당당사를 점거한 노동자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YH 여공 김경숙 양이 밀려오는 침탈자들 때문에 추락사한 것도 여기서 이다. 1979년 그 무렵 유신독재체재도 얼마가지 않아 추락사하였다. 언제부터인지 지식인들과 자유주의 야당인사들은 주변부 인생들의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대해 왔다. 2년 전에 평택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천민자본에 내쫓길 때 산자부장관을 지냈던 당시 민주당대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야당 국회의원들마저 당대표를 닮아가서 그 현장에 얼굴을 내민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지역을 선거구로 가진 야당의원의 행보조차 낮과 밤이 달랐다고 하는 말이 들릴 정도였다. 그때만 해도 이런 소식은 SNS(온라인상에서 불특정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서비스, 운영자 주)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던 시절이라 현장에 몰래 잠입한 주변부언론사 기자들 몇이 노동자들과 ‘죽기 살기’를 같이한 정도만큼만 외부로 알려졌다. 벼랑 끝에 몰린 주변부 인생들의 사회문제는 천민자본과 이를 대변한 권력의 뜻대로 밀려난 것 같았다.

2011년 새해 벽두부터 부산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의 천민자본에 대한 항의의 깃발이 영도조선소의 한 크레인에서 ‘죽기 살기 농성’을 하는 여성노동자에 의해서 펄럭이기 시작했다. 수년전 같은 장소에서 먼저 간 노조지부장의 죽음이 같은 상황에서 있었기 때문에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엊그제 고공농성 185일째인 여성노동자 김진숙을 보기 위해 185대의 희망버스에 탄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려왔고, 문화제를 진행한 참가자들의 평화적 시위행렬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한국에서 한다하는 지식인의 참회적 고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 동안 “나를 가장 부끄럽게 하는 것은 한동안 나의 삶의 뿌리로부터 절연된 지식인 상태의 삶이었다."는 자성의 목소리였다. 더 이상 노동자들이 절규하는 사회문제는 주변부로 몰린 노동자의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지원의 대상에 그칠 것이 아니다.

2012년 총선 대선을 앞두고 큼직한 화두들이 그럴싸하게 많이 들려온다. 선거를 득표수로만 보아온 이들은 중부 지역, 중간층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얘기하기를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 주택보급률은 100%를 진즉에 넘어섰는데 집 없는 사람들이 45%에 이르면 이 나라의 중간층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포괄한다고 추정할 것인가.

집이라고 할 수 없는 비닐하우스, 공사장,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 숫자만 3-4년 사이 두 배로 늘어나 25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의 진짜 처지를 한번이라도 이와 결부시켜 생각해 보았는가?

합리적인 사유라고 할 수 없는 구조조정에 노동자들이 결사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벼랑 끝에 몰린다는 것은 한때 중산층이었다고 의식했던 사람들에게 조차 불시에 닥칠 수 있는 사회구조 자체가 주는 항상적인 위협을 느끼지 못했을 때를 준별하게 만든다. 민주공화국의 정신이 우리 모두의 삶의 뿌리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정신과 별개가 아니다.  김진숙의 목소리를 전해 들어보자.

“이 땅에 더 이상 정의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이 땅에 진실을 들어줄 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땅에 더 이상 연대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먼 길 달려와 비와 최루액과 물대포를 맞아준 여러분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절망의 벽을 넘을 수 없을 거라 했을 때 온 몸으로 기어오르는 담쟁이처럼 우리는 희망을 향해 조금 씩 조금씩 여기까지 왔습니다. 전국에서 달려온 희망버스 여러분, 여러분이 게신데 제가 어떻게 포기하겠습니까. 신명나게 꿋꿋하게 보여줍시다. 여러분 너무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2011년 7월 9일, 역사는 이날을 반드시 기억할 것입니다.”

이 시각 대통령은 작업복 차람으로 에디오피아 사람들을 위해서 8시간이나 소독약 통을 등에 지고 봉사활동 중이라는 큼직한 사진뉴스가 주요 신문 지면을 채우고 있다. 어두운 에디오피아에 사회정의를 밝히려는 등불이 소중하다면 내 나라의 사회정의를 지키려는 희망버스 195대, 1만 명의 밤샘 외침에 집권 한나라당의 국민의 대표들, 제1야당의 국민의 대표들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이 땅에 진실을 들어줄 귀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주변부 인생들-사실은 생산의 주역이었고 따라서 사회 중간층의 주역이었어야 마땅했던 사람들이면서 주변부라고 내침 당하기 일쑤였던 그 사람들에게 가서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았을까. 더 이상 정의가 파묻혀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힘을 보태지 못한다면 목격자라도 되고 싶었다."는 희망버스에 참가한 중간층들의 소리에 좀 더 가까이 가야 한다.

유신 말기가 까마득하게 삼십 수 년 전인 것인 것도 같으며, 그리 멀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의식의 흐름 때문일까. 그때 당장 추락사한 것은 YH여공 김경숙 양이었지만, 유신체제도 덩어리째 추락사하고 노동자들의 절규를 보듬은 야당 당수와 마지막 남은 양심들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온몸의 숨구멍을 땀방울로 ‘소금꽃’ㄴ을 피운 김진숙이 비바람 몰아치는 고공에서 이제 190일째를 맞이하고 또 그보다 더 계속되리라. 그것은 직장에서 쫓겨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님이 분명할 터이다. 이 사회에서 한줌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삶의 뿌리에서 관철되는 정의의 정신이 민주공화국 헌법가치의 정의의 정신과 같다는 것을 보고 재확인하기 위한 그 곳에 우리가 함께 하는 그때일 것이다. (2011. 7.16, 박석률)

박석률 선생님은

▲ 박석률님
박석률 선생님은 74년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되어 옥살이를 했다. 석방 이후에는 한국진보연대를 통한 민주화운동,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공동대표 등을 통한 민족통일운동을 계속해 오다가 지금은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 사월혁명회, 평화와 통일을 사랑하는 사람들 등에서 민족, 민주, 통일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생명평화경제만민포럼" 대표이다. 저서로는 한반도의 당면 과제인 북핵문제와 관련해 펴낸 <자주와 평화, 개혁으로 일어서는 땅>(백산서당, 2003)과 <자주와 평화 누가 위협하는가> (풀무 2002), <씨알의 희망과 분노>(공저, 동연, 2012)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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