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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5.16체제에서 4.19체제로 복귀하자

by anarchopists 2019. 11.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9/11 06:09]에 발행한 글입니다.



5.16체제에서 4.19체제로 복귀하자.


1. 우리 인간사회가 1단계국가주의 사회(고대~절대주의체제)에서 2단계 국가주의 사회(자유민주의체제~현대)로 왔지만 여전히 국가주의는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아시아는 19세기 이후 2단계국가주의 사회를 서구로부터 강제 수용하였다. 그러나 서구가 아래로부터 쟁취한 데 비하여 아시아는 위로부터 주어졌다. 때문에 민주주의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인 시민(우리는 아직도 국민이라고 한다)들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서구의 시민들은 자유주의(인권과 저항)와 민주주의(평등과 평균)의 개념을 잘 알고 있다. 반면에 아시아 사람들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개념을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냥 민주주의와 지유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하여 혼동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나라사람의 경우 다른 동아시아국가에 비하여 시민의식이 크게 떨어진다.(시민은 능동적 개념이고 국민은 수동적 개념이다) 자유주의는 시민의 권리를 억압하는 제반 권력과 자본의 지배를 거부하고 이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자유주의를 자본주의 수호이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이 자유=반공으로 이해한다. 참 딱한 노릇이다. 그리고 제2단계 국가주의체제 하에서 민주주의는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보편적 가치다, 어느 한 나라에 해당하는 특수가치가 아니다.

즉 민주주의는 개인에게 사상ㆍ 종교ㆍ언론ㆍ집회·결사, 거주·이전의 그리고 신체의 자유가 절대 보장되는 이념을 말한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재산권ㆍ참정권이 보장된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권력지향적이고 자본지향적인 ‘잠재적 독재의 태동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지배원리는 사회구성원의 다수를 점하는 사회적 약자의 자유의지가 절대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때문에 민주주의체제에서 입법ㆍ사법ㆍ행정의 모든 권력층에 있는 자들의 법집행과 행정, 그리고 정책의 집행은 투명하여야 한다. 밀실행정ㆍ밀실외교는 물론 비밀스럽고 기만적인 국가경제행위, 권력지향적 사법판단행위도 금지된다. 즉, 민주주의는 상생(相生)하는 사회를 말한다. 나라구성원들이 나라의 돌아가는 정치사정에 대하여 모두가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일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등 수구기득권층을 위한 정책이나 판단은 금지된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공생(共生)이라는 말, 곧 “다 같이 살기, 더불어 살기”라는 미화된 말로 상생의 원리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체제도 아니고 절대주의체제도 아닌 제1단계 국가주의제제와 제2단계국가주의체제의 중간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 이렇게 이 나라가 어정쩡한 왜곡된 자유·민주주의제제를 갖게 된 데에는 권력을 잡은 자들의 국가소유욕 때문이다. 반공독재자 이승만이 그 초단을 만들고, 민주주의 권력을 찬탈한 친일파 박정희(일제명: 다카키 마사오)라는 자가 본격적인 주역을 담당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마다 ‘행정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기만적으로 제창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원래이념을 크게 훼손시켰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장기 집권을 하였다. 이 탓에 박정희 군부독재와 함께 살았던 나이 60대 이상의 이 나라의 대부분 사회 구성원들은 아직도 박정희는 왕이고 다른 대통령들을 얼간이로 생각하고 있다.

2. 그러면 여기서 박정희가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와 ‘한국적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성찰해보자. 먼저 박정희가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부터 보자. 1960년대 초기는 민주당정부에 의하여 겨우 민주정치와 경제발전을 위하여 몸부림 치고 있던 시기다. 이승만 반공독재를 몰아내고 모처럼만에 자유주의가 구가되던 시대이다. 그런데 이제 막 일어서려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박정희가 군화와 탱크로 무참히 짓밟고 민주정권을 총칼로 갈취하였다(1961.5.16) 합법적 혁명정부(4.19체제)를 전복시킨 반란이다. 그리고 치사하고 더럽게도 민주당정권을 매도하였다. “민주당 정권은 고귀한 희생의 대가로 성취한 혁명을 (저버렸다) 4.19혁명의 사명을 역행한 반혁명적 배신자다. 역사의 반동이다. 국민의 소망을 배신한 불신집단이다.”《국가와 혁명과 나》, 1963) 이렇게 자신들의 반란을 정당화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반란을 변죽도 좋게 스스로 혁명이라고 칭하고 이른바 ‘혁명공약 6장’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혁명공약은 대부분 거짓이다. 특히 민정이양과 원대북귀는 허구 중 허구다. 박정희의 시커먼 마음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총칼을 앞세워 ‘군정 4년 연장안’을 발표하였다. 그는 군정기간 중에 진리ㆍ정치(입법, 사법, 행정)ㆍ경제 세 권력을 모두 독점하였다. 그리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이에 반대하면 ‘반혁명분자’이다. 경제개발5개년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면 ‘반동’이다. 그는 군정 4년 연장기간 중에 공화당을 창당하고,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결국 박정희의 시커먼 속셈이 드러난 셈이다. 권력을 잡기 위한 반란(쿠데타)이 분명해졌다.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선거(1963)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 는 군사반란과 군정연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장난이었다. 전혀 ‘진리’가 담기지 않은 개념이다. 이는 민족주의 탈을 쓰고 싶어 했던 박정희가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3)에서 말한 ‘행정적 민주주의’를 통하여 정치적 정적이나 자신에 대한 비판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였다. 곧 ‘행정적 민주주의’는 못난 민족을 행정적으로 지도하여 잘난 민족으로 만들겠다는 논리다. 결국 민주주의의 가장 알짬인 ‘국민에 의한 통치’, ‘국민의 알 권리’를 유보한다는 논리다. 4.19혁명을 일으킨 국민을 이렇게 허깨비로 만들 수는 없다.

그가 말하는 ‘민족적 민주주의’ 내용을 보자.
“사대주의와 식민주의 및 봉건 잔재 청산 그리고 우리의 체질에 맞는 민주주의 실현”이다. 이는 반란에 의한 군정을 ‘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포장하려는 수작이었다. 결국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한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 된 이후, 비밀외교를 추진하였다. 그 첫 단추가 한일회담이다. 군사반란을 일으킨 박정희는 군정 때부터 암암리에 한일회담을 추진하였다.(1961.10.20) 그리고 이듬해에는 국가의 이권을 팔아먹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교환하였다.(1962.11.12, 도쿄) 그러나 한일회담 소식을 전혀 몰랐던 인민들은 1964년 6월 초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인민들은 분노하였다.

그러자 박정희는 그 본색을 드러내고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다.(1964.6.3) 그리고 계엄령 속에서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채 한일회담을 계속하여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1964. 6.22) 민주주의의 유린이다. 이에 학생 시민들은 분노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자유주의의 표출이다. 이에 박정희는 독재본성을 드러내고 자유주의를 탄압하였다. 위수령 발동이다.(1965.8.23) 대학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학생데모를 탄압하였다. 이때부터 국민들은 박정희 독재 권력을 “박정희 권력=민족적 민주주의=반민족친일파”라는 등식을 만들고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사형선고를 내렸다. 아무런 통치이념도 담기지 않은 ‘민족적 민주주의’ 주장은 결국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탄압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이다. 학생과 시민들의 ‘민족적 민주주의’ 사형신고 이후 박정희는 이를 거론치 않았다.(취래원농부, 2009. 4.25 처음 씀, 2012.9.11. 고침,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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