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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씨알

1974~5년의 씨알의 소리와 박정희, 그리고 박근혜정부

by anarchopists 2019. 11. 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3/02/28 06:32]에 발행한 글입니다.


1974~5년의 씨알의 소리와 박정희,
그리고 박근혜정부


1974년과 1975년은 이른바 유신헌법 하의 대통령 긴급조치를 나구 휘두르던 때다.
<씨알의 소리>는 이때 가장 많은 탄압을 받았고 또한 가장 치열하게 저항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벼럭처럼 떨어지면서 씨알에 대한 압수, 사전검열, 연행, 연금, 조사는 가속화되었다. 74년 1월호 4천부가 전부 압수 당하고, 직원이 끌려가고, 함석헌선생님이 연행되고, 장준하 편집위원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이 선고되고, 이해 4월 20일 씨알창간 기념강연 후 김동길 편집위원이 민청사건으로 끌려가 15년형을 선고 받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과 우리의 반성"(함석헌), "기원 2000년의 한국"(김동길), "악법의 한계"(박형규)는 이시기에 쓰여진 것이었으나 전면 삭제되었다.

1975년 1월, 동아일보광고사태를 비롯하여 동아, 조선일보 기자 축출사건이 발생하던 때  "동아일보 광고사태의 진상"(장윤환), "조선일보 사태의 진상"(정태기) 글이 전면 거부 당했다. 또 이해 4월 김상진열사의 "양심선언"이 나왔다. 피를 토하는 듯한 양심선언은 결국 열사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채광석님의 "오둘둘보고서"는 5월 22일 관악캠퍼스에서 있은 김상진 군의 학생 주최 장례식 날 보고서를 말한다. 이 사건으로 200명의 학생이 끌려가 수난을 받고 <씨알의 소리> 편집장이었던 박선균 목사가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75년 1월 19일은 4.19 15돌이자, <씨알의 소리> 창간 5주년 기념강연회가 정동교회 구내 젠센홀에서 극적으로 열렸다. 김대중 선생의 "한국정치 현실"을 동경납치 이후 3년만에 처음 하는 강연이었다. 이 자리에 함석헌 선생님, 장준하 선생님 등 3,000여명이 모였다. 이 일로 장준하 선생님은 이해 5월 약사봉 등산(?) 길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국내 신문에는 학생데모 기사나 연행, 연금, 검열, 압수, 저항집회 등에 관한 기사는 한 줄도 기사회되지 않았다.

이 글은 박선균 지음 <금지된 씨알의 소리>에서 인용된 박선균 저자의 글이다. 1974~5년 시기 유신체제 하에서 박정희가 황제화의 길을 가기 위하여 어떻게 이 나라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짓밟았는지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헌법개정 운운하는 소리가 들린다. 유신헌법의 계승이 아니길 바란다. 헌법 개정과 관련하여 박근혜 정부에 바라고 싶은 것은 다시는 이 나라에 민주주가 후퇴하는 일이 없도록 헌법에 못을 박아주었으면 하는 부탁이다. 이 나라 주권은 국민(나라사람=씨알)에게 있음을 후대까지 영원토록 이어지도록 해주었으면 한다.(2013. 2.28, 황보윤식)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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