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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세상 바로 보기

1960년대~1980년대를 진단한다.

by anarchopists 2019. 11. 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12/11 06:10]에 발행한 글입니다.


1960년대~1980년대를 진단해 본다.
새누리당 뿌리에서 배출한 대통령시대를 중심으로


다음 글은 한길사 간(2012) 《생각과 실천》 2권(219~224쪽)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새누리당의 전신 정당(공화당, 민주정의당)에서 배출한 대통령(박정희, 전두환)의 집권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함석헌의 글과 관련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960년대 한국과 세계는 정치사회적으로 아주 혼란한 시대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함석헌의 평화주의사상도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그의 글들이 나온 시대적 배경과 분위기를 보자. 5.16군사쿠데타 직후 쓴 글로, 〈한나라의 갈길〉(《한국혁명의 방향》, 1961)이 있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민정이양의 약속을 어기고 집권야욕을 보인다. 결국 기회주의자 박정희는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독재의 길로 들어선다.(1963) 이때 나온 글로, 〈호소〉(《安島山全書》 출판기념회 강연, 1963.7), 〈정의와 진리에 살자〉(《思想界》 주최 시국강연회, 1963. 7.22) 〈누구 믿을 때 아니다〉(구미순방 후, 귀국강연, 1963.11.23) 등이 있다.

또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사회주의식 경제개발정책인 5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그 자신이 스스로 사회주의경제논리를 써 먹는다. 이는 “잘 먹고 잘 살아 보자”는 올가미를 씌워 나라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박정희는 권력연장을 위해 남북긴장관계를 교묘하게 조장하고 반공적 분단고착화와 함께 독재권력을 만들어 간다.

이어 1968년은 국내외에 유난히 전쟁기운이 많았던 시기다. 북조선 인민군 소속 무장유격대(침략을 받은 남한의 입장에서는 공비共匪의 개념으로 쓴다)의 청와대 기습미수사건(1968. 1·21 사태), 북조선의 미군 함대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1968.1.23.), 베트남에서 한국파월군의 퐁니·퐁넛 양민학살 사건(1968. 2.12)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중부의 꽝남 성(영어: Quang Nam Province)의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에서 비무장 양민(주로 여성과 아이)이 79명이 대한민국 월남 파병군인 해병대에 의해 대량 학살된 사건, 소련군 등 바르샤바 조약기구 5개국 군대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8.20) 등이 있었다. 이 시기에 함석헌도 그의 중심사상인 평화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한다. 바로 〈평화문제에 대하여〉(서울 ‘마음의 광장’ 정기 토요집회 강연, 1968. 10.5)이다.

1970년대로 들어섰다. 박정희는 반공개발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의 생존권 투쟁과 지식인의 민주화 요구를 폭력적으로 탄압한다. 특히 1970년의 노동탄압과 인권탄압은 두드러진다. 이에 항의하여 노동자와 대학생들이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분신자살사건’이 대표적이다.(1970.11.13.) 이에 노동계와 지식인들이 술렁이었다. 결국 지식인들이 반발하였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들의 대학자유화 요구 선언발표가 있었다.(시국선언, 1971. 8.19) 이에 자극되어 학생들의 데모도 격렬해진다. 그러자, 박정희 독재권력은 서울특별시에 위수령을 발동한다. 그리고 고려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을 진주시킨다(10.15) 이에 함석헌의 필봉(筆鋒)도 가만있지를 않았다. 〈전태일을 살려라〉(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주최 강연, 1971, 날짜 미상)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어 1972년은 우리나라에 파란만장한 곡절이 많았던 시기이다. 그 중 분단세력들의 기만적인 7.4 남북공동성명과 유신체제 발동(10.17)은 이 나라 역사에 오욕을 남긴 사건들이다. 다시 시간별로 보자. 국제적으로 미국은 중국과 핑퐁외교를 전개한다.(1971) 그리고 중국과 함께 ‘상하이공동성명’을 발표한다.(1972. 2.21.) 이어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를 시작한다.(8.11) 미국은 자신들의 외교정책에 한반도(남한)를 이용한다. 박정희에게 남북관계 긴장완화를 압박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이에 박정희는 마지못해 남북적십자회담을 평양과 서울에서 개최한다.(8. 30, 9.13) 이어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과 첫 핵무기제한조치인 전략무기제한협정(SALTⅠ)에 조인한다.(10. 3)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있자, 권력욕에 불타던 박정희는 이러한 국제 해빙분위기를 역이용한다. 영구총통제 획책이다. 그것이 반동적 ‘10월 유신’이라는 폭거(暴擧)로 나타났다.(10.17) 이러한 시대상황이 전개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을 때, 함석헌은 이미 〈세계평화의 길〉(안양농민교육원 제1차 독자수련회, 1972 1.28), 〈평화운동을 일으키자〉(《씨ᄋᆞᆯ의 소리》 11호, 1972.5) 등의 그의 평화주의사상의 핵심적 글들을 내놓는다.

1979년은 박정희의 권력내부에서 자기모순이 터져 나온 해다. 그토록 권력욕에 불타던 박정희의 반공군부독재, 정경유착형 개발독재도 종막을 고하게 된다. 곧 신임하던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죽임을 당함이다(10.26) 박정희가 죽임을 당하기 바로 열흘 전에 함석헌은 〈웃으며 싸워봅시다〉(미주 위싱턴 한인교회 강연, 1979.10. 14)를 발표한다.

1980년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세력들이 권력찬탈을 노리고 광주학살사건을 일으킨다. 이에 저항하여 광주시민의 민중기의가 일어난다. 곧 ‘5.18광주시민혁명’이다. 이러한 사회적 아픔을 뒤로 한 채, 전두환은 끝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된다(8. 27) 이러한 험악한 분위기가 있기 전, 함석헌은 종교세력과 결탁한 제2의 시민혁명을 바라는 〈오늘 우리에게 4.19는 무엇인가〉(CBS 공개강좌, 1980.4.10)를 발표한다.

계속해서 정치적 정통성이 없었던 전두환은 대대적인 박정희식 언론탄압에 들어간다. 이 때문에 1982년은 전두환 권력의 언론통제와 정치적 강압에 의해 사회정서가 얼어붙고 있었다. 전두환은 양심적 민주세력들을 “반국가변란죄, 국가반역죄” 등으로 조작하여 감옥에 가둔다. 아람회사건(1981. 8) 오송회사건(1982. 12)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대상황이 얼기설기 연출되고 있을 때, 함석헌은 비폭력의 참 의미가 담긴 〈진실 하라, 온유 하라, 두려워 말라〉(YMCA 간디 34주기 추모강연회, 1982. 1.30)를 발표한다.

5.18광주학살은 정권을 탈취하려는 나쁜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씻을 수 없는 비극적 대학살이다.
그런데 이 민족대학살에 미국이 묵계적(默契的)으로 개입하였다는 사실이 지식인들의 폭로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다. 그것은 광주학살의 만행을 저질은 군인들의 광주이동이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주한미군의 감호아래 아래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대학생들이 감지하게 된다. 이에 분노하여 대학생들의 반미분위기가 고조된다. 반미분위기는 친미적 전두환의 군부독재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고, 미국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다.(1980~1983)

곧, 광주 농민의 미국문화원 방화사건(1980.12.9.)과 부산 대학생들의 미국문화원 방화사건(1982. 3.18), 그리고 강원대 학생들의 성조기 소각사건(1982. 4.22), 대구 미국문화원 방화사건(1983. 9. 22) 등 반미운동이 각지에서 계속 터져 나왔다. 이러한 반미분위기가 감돌 때, 함석헌은 〈씨알과 새 역사의 지평〉(명동 가톨릭문화회관, 1983.2.22), 〈큰 도둑과 작은 도둑〉(미국순방 중 수난자가족돕기회, 1983, 겨울), 〈새 세대에게 주는 말〉(고려대학교 개교 79주년 한국사상강연회, 1984.5.3)등의 강연을 하면서 당시의 신군부 독재권력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발체, 취래원농부 201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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