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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일요 시론, 시평

11돌 6.15선언, 그리고 역사적 의미

by anarchopists 2019. 12. 2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6/12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11돌 ‘6.15남북공동선언’과 역사적 의미

1. 우리는 같은 민족이면서 두 나라로 나누어져 살고 있다. 그래서 서로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에서는 남한과 북한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북조선과 남조선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강토에 대하여서도 남한에서는 한반도로, 북조선에서는 조선반도로 쓰고 있다. 이러한 분단고착적 언어들이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이하 6.15선언)으로 많이 변하였다. 특정국명을 뺀 “남과 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점이다. 이것은 한민족, 한 나라이기를 바라는 민족 공통의 잠재된 의식이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후 남북은 민족통일이 얼마나 소중한 우리의 염원이며 의지인지를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6.15선언은 그 동안의 남북 사이 대립구도를 극복하고 반성과 화해라는 민족생존구도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미국과 남한의 국가보안법이 통일에 얼마나 큰 훼방을 놓는 존재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그 동안, 남북 사이 공동노력으로 이루어진 <남북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합의서)와 6.15선언은 남북 존재와 상대방 체제의 상호인정, 두체제의 공존공영 확인이라는 헌법적 의의를 갖고 있다
. 그렇지만 남한은 이에 상충되는 국보법과 반통일세력인 미군이 존재함으로써 우리 사회는 사회적, 정치적 민주화가 답보상태에 있으며 분단민족이 강제로 정체(停滯)되어 있다. 이렇게 미군의 존재와 국보법은 민주주의나 민족통일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6.15선언의 의미와 국보법의 성격을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는 6.15선언의 성립과정과 역사적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1960년, 이승만 친일친미정권의 악취가 나는 부정부패로 학생과 시민을 주체로 하는 4 .19시민학생혁명이 일어났다. 4. 19시민학생혁명은 이승만 반공정권의 기조를 무너트리고 진보적 통일론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지식인ㆍ학생 등 혁신세력에 의한 민주주의운동과 민족통일운동(평화통일론)도 야수들의 5.16군사쿠데타로 불법화되고 탄압받았다. 그리고 박정희는 반공을 국시로 하여 “북한의 남침위협”이라는 상투적 구호로 국민을 협박하면서 비열하게 “빨갱이 몰이”로 독재권력을 정당화하였다. 그 후 박정희는 미국이 ‘한반도 분단고착화 정책’을 쓰자 이에 노예적 태도를 보이면서 서울(1972.8.29)과 평양(1972.9.12)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한국 역사상 가장 민족기만적인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1972) 이것은 겉으로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의 평화통일 3원칙을 제기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한반도의 분단상태를 고착화시키고 두 개의 반통일나라를 전착(纏着)시키려는 속셈이 숨어 있었다. 그리하여 남과 북에서는 남한(박정희)과 북조선(김일성)의 일인통치체제를 각각 인정하는 유신체제(1972.10.17)와 사회주의헌법(1972.10.27)을 공포하였다.

박정희의 장기집권과 민족분단의 고착화 음모가 숨어 있는 유신체제가 출범하자, 이에 대항하여 전민중적 저항(민주화운동)이 열화와 같이 일어났다. 결국 1979년 박정희 권력내부의 모순에 의한 10.26사태로 유신권력은 막을 내렸다. 10.26사태 후 남과 북은 다시 진보적 통일론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억울하게도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가 금수와 같은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1980년 5월 광주시민혁명이 폭발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비호를 받는 신군부의 야수와 같은 폭력적 무장탄압으로 5.18광주시민혁명은 실패되었다. 이 탓으로, 민주화운동 및 민족통일운동도 한 동안 침체되었지만 인민대중은 악독한 무단통치에도 굴하지 않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축소 조작과 연세대생 이한열의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의한 부상을 계기로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6.10민중항쟁’을 일으켰다.(1987)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민족통일운동이 민족민주세력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에 굴복하여 노태우 정권은 7.7선언(1988)과 조잡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어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1991.9.17)하고 남북고위급 회담을 열어 미흡하나마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였다.(1991.12.12) 합의서의 체결은 주체적ㆍ평화적 민족통일을 위한 대헌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1990년대는 대격돌의 시대를 극복하고 ‘평화공존’으로 전환되는 시기로 들어섰다. 그러나 남의 대북핵공격훈련인 팀스피리트 작전과 북의 핵문제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면서 합의서는 이행되지 못한 채 답보상태를 거듭하였다. 노태우 뒤를 이어 호랑이 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던 자기모순의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김영삼은 미국의 남북 영구분단, 대북 고립 압살정책의 충실한 추종자로 세월만 허송하였다.

통일의 여망을 안은 남의 인민대중은 결국 군부독재권력을 종식시키고 김대중의 국민정부를 선택하였다.
김대중은 1970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민족상생의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북의 김정일도 그 나름대로의 국가발전 대계와 민족통일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김대중의 등장과 함께 민족통일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조-미대결의 종속적 대결구도로서 남북관계와 미국의 철저한 노예적 대리인인 한국정부라는 양면구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2000년 6월 13일 민족분단 55년 만에 남의 최고지도자가 북의 땅을 밟고 그곳 최고지도자와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6월 15일에는 외세의 강제에 의한 갈등과 대립의 시대를 마감하고 화해와 협력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그 결과 <6.15 남북공동선언>이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채택되었다. 이와 같이 6.15선언은 우리민족의 조국통일을 위해 달려온 인민대중들이 역대 친미반공세력과 투쟁에서 얻어낸 보석이요 진주다.

3. 그러면 이제 6.15선언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남북 사이 적대적 모순을 이기고 비적대적 모순이 서로 회담하는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협력함으로써 6.15선언이라는 ‘통일이정표를 만들어낸 소중한 회담이었다. 6.15선언은 미국의 전략에 의하여 오래도록 남아 있던 동북아시아의 냉전질서를 해체시키고 이 지역에 평화와 친선, 그리고 경제적 번영을 약속하였다.

둘째, 역사적으로 대립의 골이 깊었던 남과 북이 적대감을 갖지 않게 되었다. 6.15선언은 남ㆍ북 두 정상 사이의 화해와 협력ㆍ통일에 대한 합의로, 상호전쟁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평화통일선언이었다.

셋째 6.15선언으로 남한의 정부당국이 명실상부하게 통일의 한 주체가 되었다. 그리고 민간통일운동이 합법화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마련되었다. 정부당국이 통일문제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통일을 바라지 않는 분열주의 세력(뉴라이트, 한나라당)을 제외하고는 민족의 역량이 최대로 결집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민간통일운동이 더욱 대중화될 수 있는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넷째, 6.15선언은 전통적인 한미외교관계에도 균열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변화는 1945년 이후 우리민족을 분열시켜놓고 북에 대해서는 고립압살정책을, 남에 대해서는 지배예속정책으로 일관해 오던 미국에게 매우 위험한 정책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최소한 남쪽의 반미세력이 정당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다섯째, 6.15선언으로 한국의 민중들은 반미정서가 비약적으로 확산ㆍ발전되었다. 반미정서는 조-미 대립구도를 기본 전략으로 하면서 대북압살정책을 전술로 하는 통일의 훼방세력인 미국에 대하여 한민족의 민족자주화를 이루면서 민족통일운동의 주체적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즉, 남쪽 인민의 반미정서는 우리 민족 전체의 공멸을 가져올 수 있는 미국의 대북전쟁계획에 대하여 “전쟁반대, 조미불가침조약 체결”을 요구함으로써 민족의 생존권과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여섯째, 6.15선언은 한반도 분단의 역사를 종결짓는 분기점 역할을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과 대한민국 대통령이 공식 서명 한 것은 두 개의 나라이름과 그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직위를 명시한 셈이다. 이것은 남과 북의 정치적 실체를 두 개의 주권국가로 상호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4.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6.15선언의 이행을 위한 상호 실천노력은 반공독재권력에서는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많은 변화를 우리 사회에 가져왔다. “비전향 장기수” 전원의 북송조치, “이산가족 상봉”의 지속적인 추진 등 인도적 사업이 먼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00년 북쪽 소년예술단의 서울 방문공연, 시드니올림픽에서 북과 남 선수단의 공동입장,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600여 북쪽응원단의 참석 등 문화ㆍ체육분야의 활발한 교류도 있었다. 그러나 6.15선언 이행의 핵심은 경제적 지원과 교류이다. 금강산 관광단지 개발, 개성공단 조성, 그리고 남북철도의 연결과 인적ㆍ물적 자원의 수송계획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민족동질성 회복, 가족애를 기초한 인도적 조처, 문화ㆍ체육교류, 경제적 지원과 교류는 우리 민족 인민들 마음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이데올로기에 의한 남북대립구도를 급속히 무너트렸다. 그렇다고 해서 6.15선언이 긍정적 측면으로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아픔도 있었다. 반통일 극우세력인 한나라당은 경의선과 동해선의 연결사업이 합의되었을 때 “북의 남침로(南侵路)를 무방비하게 열어준다”는 식의 폭언을 하였고 유엔군사령부(미국)는 비무장지대 통행에 대한 유엔사 승인이 필요하다고 억지를 부리는 추태도 보였다. 또 수구세력(한나라당 의원을 주축으로 하는)들은 ‘현대상선 대북송금 특검법’을 발의하여 6.15선언에 흠집을 내고 남북화해와 협력에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미국 등 반통일세력의 음모는 ‘북핵’과 ‘악의 축’ 발언으로 민족의 공멸을 가져올 전쟁위기 상황으로까지 몰아갔었다. 이와 더불어 가장 슬픈 일은 남북화해와 협력기반을 안으로부터 무너트리는 내부의 적, ‘국가보안법’ 철폐 노력의 실패이다. 이렇듯 6.15선언이 있었음에도 수구기득권세력과 미국은 아직도 6.15선언의 방해세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국정실패를 저들의 권력장악 호기로 보고, 재집권을 의식하여 국보법 철폐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박재(薄才)한 정치경험을 가진 노무현 정권에 의한 ‘한미FTA’ 타결로 한미관계가 다시 노예적 굴욕관계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MB권력의 반통일정책과 복한에 대한 압살정책 등으로 6.15선언은 사실상 폐기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렇지만 6.15선언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식은 대미인식의 변화이다. 한(조선)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최대의 선결과제는 미국(미군)을 극복하는 일이다. 반미자주 없이는 평화도 없고, 평화가 없으면 통일도 없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통일운동, 평화운동은 반미운동에서 출발해야한다는 인식이다. (2007. 5.21, 인하대 인문연구에서 발췌, 2011. 6.12 다시 쓰다.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인터넷 구굴에서 찾되, 위의 사진은 프레시안에서 맨 아래 것은 민중의 소리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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