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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10.26의 역사적 사건과 서울시장 선거

by anarchopists 2019. 12. 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0/24 08:50]에 발행한 글입니다.


10.26의 역사적 사건과 서울시장 선거

오는 10월 26일은 서울시장 보궐선거일이다. 이 날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뜻 깊은 날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는 안중근이 일본제국주의 총리를 지낼 때 조선에 을사늑약(1905.11.17.)을 체결시켰던 한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주 하얼빈에서 사살한 날이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는 김재규가 유신체제를 통하여 황제를 꿈꾸던 박정희를 사살함으로써 이 나라에 일당일인 독재에 종말을 고하게 한 날이다. 그래서 10.26은 이 나라에 뜻 깊은 날이다.

그런데 이날에 박정희 독재자가 이끌던 공화당의 후신 한나라당 출신 오세훈 서울시장이 민심을 잊고 물러난 후(8.25) 보권선거를 한다. 이 선거유세전에서 흥미로운 것은 내년 대선에 나올 예정(?)인 독재자 박정희 딸 박근혜가 선거유세전에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가 선거유세전에 가세하고 있는 내면을 보았을 때 몇 가지로 추측이 된다. 첫째는 내년 대선을 겨냥하여 한나라당에 대한 민심이 어떤지를 알아보자는 일이요. 둘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에 대한 지지율이 어떤지를 확인해 보자는 일이다. 그리고 셋째는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대선유세를 미리 하자는 거다. 겉으로는 서울시장을 야권에 빼앗기면 자신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개인적 이익’과 연결되어 있다는 세인들의 판단도 옳다.

오늘 이글의 주제는 10.26이다. 그래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거와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의거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해 보자. 먼저 안중근 의거다. 일본제국주의(이하, 일제)에서 4번이나 총리직을 역임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고종 황제를 협박해 을사조약을 체결시킨다. 이에 전체 조선인은 분노하였다. 이토는 조선민족의 원수가 되었다. 그러던 중 만주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하던 안중근 등이 이토를 사살하는 거사를 계획하였다. 마침 이토가 러
시아 재무장관 코콥체프와 회담을 하기 만주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이때를 노리고 이토를 총으로 쏴 사살하였다. 그리고 안중근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다음으로 김재규 의거를 보자. 1961년 반민족적이면서 기회주의자였던 박정희가 이 나라가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려 할 때, 총과 탱크를 몰고 와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권을 강탈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헌을 유린하며 일인독재를 계속하다가 1972년 10월 유신을 일으켜 황제화를 음모하였다. 박정희의 황제화 음모과정을 보자. 박정희 철권통치기인 1960년대에에 북한이 남북공존을 인정하는 “남북연방제통일방안”을 먼저 제기하였다.(1960.8.15) 그러자 박정희는 북한의 이러한 주장을 “북한의 남침위협”이라는 상투적 구호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한국국민을 협박하였다. 이어 인민혁명당사건(1964. 8)과 통일혁명당사건(1968. 8.24) 등을 조작하고 “빨갱이 몰이”를 시작하였다.

이때 국제사회는 변하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 미국은 “아시아 각국은 스스로 협력하여 내란이나 침공에서 자국을 방위해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1969. 7.25) 그리고 미국은 핑퐁외교 오케스트라 외교를 통하여 중국과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1972. 2.28) 이어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고착화 정책’을 쓰게 된다. 그러자 박정희는 이에 편승하여 북과 접촉을 시도한다. 서울(1972. 8.29)과 평양(1972. 9.12)에서 각각 개최한 남북적십자회담이 그것이다.

그러나 남북적십자회담은 연막이었다. 남북적십자화담을 대국민용으로 진행시키면서 막후에서는 남북의 두 독재권력들이 정치적 비밀접촉(1971. 11월부터)을 하고 있었다. 이 결과로 탄생된 것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민족기만적’인 ‘7.4남북공동성명’(1972)이다. 여기에는 남북의 두 분단독재권력이 정치적 비밀접촉을 통해 내면적으로는 한반도의 분단을 현실화하고 두 개의 조국을 전착시키려는 속셈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남한의 분단독재자인 박정희와 북조선의 분단독재자인 김일성이 각각 일인통치체제를 서로 인정하는 유신헌법(1972. 10.17)과 사회주의헌법(1972.10.27.)을 공포하였다는 사실에서 이를 입증할 수 있다. 이어 박정희와 김일성은 각각 동시에 <평화
통일외교정책선언>과 <조국통일 5대강령>을 발표하였다.(1973. 6.23) 여기서 남북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발표하였다. 곧 박정희와 김일성 두 분단세력이 영토분단 고착의 의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7.4남북공동성명의 음모가 탈로(?)나면서 남에서는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전민중적 궐기(민주화운동)가 열화와 같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은 서울 남산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제막식이 있는 날이다. 이날 이 민족을 강탈하던 일제의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의 착한 혼령이 이 민족과 나라를 기망(欺罔)하던 박정희를 사살시킨 날이다. 결국 박정희의 권력에 대한 끝 모르는 탐욕은 박정희 독재권력 내부의 모순에 의한 10.26사태(1979)를 맞아 막을 내리게 된다. 곧 김재규 의거이다.

이러한 역사적으로 정의와 자유의 진실이 담겨 있는 이날에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쳐다보아야 하나. 10월 26일은 ‘역사적 진실’이 담긴 날이다. 그 ‘역사의 정의’를 오늘의 우리가 배우면 안 될까. (2011. 10.24, 취래원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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