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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10월 유신, 그것은 박정희 황제화의 음모였다.

by anarchopists 2019. 12. 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0/17 07:36]에 발행한 글입니다.


10월 유신, 제제화의 음모였다.

1972년 10월 17일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박정희의 공화당 시절에 있었던 민족수난의 국치일이다.
곧 ‘10월 유신’(유신체제)을 말한다. 유신(維新)이라는 말은 중국 고대 문헌에서는 종종 사용되어 왔던 말이다. 고대 중국에서 쓰였던 유신이라는 용어는 ‘새롭게 바꾼다’는 뜻이다. 곧 낡은 제도를 새로운 제도로 바꾼다는 의미다(《詩經》, 〈大雅〉編, 文王條) 근대에 들어와 동아시아 삼국에서는 이 유신이라는 말은 근대화(공업문명화)의 개념으로 썼다. 그래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 중국 광서제에 의한 무술유신(戊戌維新, 1898)이 있었다. 이 모두 입헌군주제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화운동이었다.

근대조선에서도 유신운동이 있었지만(1895년 갑오경장)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 한반도는 일본제국주의에 강점되어 국권을 강탈당하는 바람에 식민지수탈을 위한 공업문명화가 강제되었다. 따라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유신운동이 있지 못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 국가가 성립되고 독재권력들이 장기집권을 노리는 과정에서 박정희가 군부쿠데타를 주도하고 국헌을 흔들어대며 제제화(帝制化;皇帝化)를 위한 음모를 꾸몄다. 곧 때늦은 한국적 근대화(조국근대화)라는 구실을 붙였다. 일본제국군대의 장교였던 박정희 머릿속에는 일제의 정치구조밖에 모른다. 메이지유신이다. 일본 메이지유신=일본의 근대화=천황일인체제화를 그대로 모방하여 한국의 조국근대화=유신체제=박정희황제화를 음모하였다. 이것이 10월 유신(1972.10.17)으로 나타났다.

10월 유신은 분명 유신의 참뜻이 없다. 진정한 조국근대화가 아니었다. 불순한 음모였다. 제제화의 일환이었다. 그러면 10월을 단행한 시대적 배경을 보자.

먼저 정치적으로 박정희의 제제화 야망이 숨어 있었다. 박정희가 당시 야당당수인 유진산에게 말한 사실만을 가지고도 이를 입증할 수 있다. “여보 유진산 선생, 이승만 박사는 학생 200명이 죽으니 겁이 나서 대통령을 물러났소. 내 똑똑히 말해두겠는데 나는 학생이 2만 명이 죽더라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오."(김경재, 《혁명과 우상》 김형욱 회고록4, 인물과 사상사, 2009, 28쪽)

한편으로 박정희는 3선개헌(1969. 9.14. 국회 날치기통과, 1969.10.17. 국민투표)으로 국헌을 유린하고 권력의 독재화를 노렸다. 이에 당시 신민당의 유진오 총재는 “3선개헌은 민주주의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이며, 이 다리를 넘어서는 날에는 평화적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을 길이 영원히 막힐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을 당시 민중들도 알고 있었다. 1971년 대선과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이 이를 입증한다. 총선(5.25선거)에서는 야당이 개헌을 저지할 수 있는 의석을 얻었다.(204명 중 89석) 그리고 1971년 대선(4.27)에서는 부정개표가 아니었더라면 야당후보인 김대중이 대통령직을 인계 받을 수 있었다.(김대중 회고록) 여기에다 함석헌 등 재야 및 학생들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이 더욱 치열해져 갔다. 덮친데 겹친 격으로 공화당 내부의 권력 갈등과 항명파동(국회에서 오치성 내부장관 해임결의안 통과사건)도 일어났다. 게다가 3선개헌을 하면서까지 겨우 당선된 대통령직(7대)에서 물러나면, 더 이상 각하(閣下) 소리를 못 듣는다.

둘째 국제사회에도 변동이 온다. 1960년대 말부터 국제사회에 변화가 왔다. 닉슨 독트린(1969.7.25.)이다. 미국은 이에 따라 월남파병의 철수와 주한미군의 감축이 있게 되었다. 이어 미국은 한국에게 북한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라는 압력을 해들어 왔다. 이는 반공논리를 권력기반으로 이용하고 있던 박정희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교활한 박정희를 이를 다시 기회로 만들었다. 대통령 선거 전의 <통일기반 조성을 위한 접근방법에 관한 구상>발표(1970. 8. 15)이다. 여기서 평화통일론을 내세우며 민족주의 거죽을 뒤집어썼다. 기회주의자 박정의의 기발한 아이디어다. 그리고 이리의 거죽을 쓴 채 북한에 '남북가족 찾기 회담'을 제의했다(1971.8.12) 그리고 판문점에서 남북실무자의 만남을 만들었다.(1971.8.20)

그런데 박정희는 이렇게 민족주의를 위장하더니 갑자기 남북대화와 국제정세의 변화를 내세워 ‘국가비상사태’(1971. 12.6)를 선포했다. 중국의 유엔가입을 계기로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남침준비에 광분하는 북한의 행동을 주시한 결과, 한국의 안보가 위태롭다는 이유다. 그 내용은 어차구니 없는 내용들로 가득 찼다. “국가시책의 국가안보 최우선”, “안보위주의 새 가치관 확립”, “대통령에게 비상대권 부여”였다. 그래서 사회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언론보도의 통제, 국민자유의 일부 유보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어안이 벙벙하니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 되었다.

셋째, 경제사회적으로,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순조로운 진행은 오히려, 지역간·도농간 격차를 심화시켰다. 이는 사회적 불안으로 왔다
. 곧 박정희는 장기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민심을 얻어야 했다. 그것은 가시적 경제성장이었다. 하여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급격하게 밀어붙이기식 공업문명화를 추진하였다. 박정희식 공업문명화는 유가적 전통질서(학자관료ㆍ연고주의ㆍ감찰제도)를 전승한 유가자본주의를 만들어냈다. 곧 봉건사회의 학자관료를 계승한 국가관료들이 위로부터 자본주의이다. 이 결과 한국의 경제구조는 수출위주형ㆍ금융특혜형ㆍ정경유착형 유가자본주의사회가 성립되었다. 이에 따른 사회적 부조리, 부패, 비리 등 악순환이 꼬리를 일고 일어났다. 이 탓으로, 자본집중, 빈부심화, 저성장율, 실업률 중가 등 비정상적인 사회구조와 비윤리적, 비도덕적, 비인간적 범죄구조가 꽈리처럼 형성되고 있었다. 곧 한국사회에 부패하고 타락한 자본주의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타락·부패한 자본주의에 대한 민중저항(민중기의)이 일어났다. 곧 전태일의 분신사건, 광주대단지 폭동사건, 체불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파월(派越)노동자들의 대한항공 빌딩 방화사건 등이다.

이와 같은 한국사회와 국제적 사회의 변화 속에서 박정희는 합리적 수단보다는 강경수단으로 대응해 나왔다. 곧 〈국가보위법〉(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날치기 통과시킨다(1971. 12.27) 이를 기반으로 독재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박정희는 남북대화와 냉전체제 와해라는 국제정세를 역이용하여 민족주의 탈을 뒤집어썼다.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제제화 음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는 그의 제제화 음모에 북한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바로 ‘7.4남북공동성명’(1972, 이하 7.4성명)으로 나타났다. ‘7.4성명’에는 민족에 대한 진심이 없는 거짓 성명이었다. 박정희 제제화의 길을 열어주는 첫 단추였다. 그래서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의 분단세력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들 말한다. 다음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이후락 부장이 북에 전달한 메시지를 보자.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美우드로윌슨센터, 北 1971-72년 외교문서 분석) 이렇게 박정희는 유신체제 발동을 위해 북과 협의하였다.

그리고 박정희는 내부적으로 남북대화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국민총화와 능률의 극대화라는 구실을 내걸었다. 곧 영구집권과 권력강화를 위한 연막이었다
. 곧 7.4성명 후 남북적십자 제1차 본회담(1972. 8.29)과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1차 회의(1972.10.12.) 등 남북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념 등 문제로 난관에 부딪치면서 불안한 정국이 조성되었다. 박정희는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박정희는 느닷없이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모든 대학은 휴교가 강제되었다. 정당의 정치활동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신문· 통신에 대한 사전 검열제가 실시되었다. 비상계엄령은 비상국무회의로 하여금 국무회의와 국회의 입법기능까지 떠맡도록 했다. 이게 바로 10월 유신이다.(1972.10.17. 대통령특별선언)

10월 유신으로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중국의 무술유신처럼 입헌군주제를 하자는 박정희의 음흉한 음모가 발현되었다. 박정희는 그가 황제(입헌군주)가 되는 ‘유신헌법’을 발의하여 통과시켰다.( 국민투표 1972. 11.21, 1972.12.27.공포) 명분은 조국근대화를 위한 ‘한국적 민주주의’의 기본법 제정이다. 그런데 한국적 민주주의의 기본법이라는 유신헌법에는 민주주의(국가권력에 대한 의회적-시민사회적 통제)가 없다. 그리고 자유주의(국민기본과 노동3권과 정치활동 등)도 없다. 여기에는 파시즘체제를 이끌 기구만 있었다. 곧 ‘유정회’와 ‘통일주체국민회의’다. 이들 기구의 실체는 박정희를 황제화하기 위한 제도적 틀이다. 유신헌법에 의해 이제 박정희는 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1972. 12.27 취임) 그러나 그 실은 1대 박정희 황제의 탄생이다.

이어 박정희는 그의 영도력을 선봉에서 휘날려줄 대중운동을 일으킨다. 곧 ‘새마을운동’의 본격화다. 계속해서 박정희는 그의 황제화(유신헌법)에 일체 비판을 금하는 긴급조치를 발동시킨다.(1호, 1974.1.8~ 9호, 1975. 5.13) 이로써 나라사람들은 국가적 감시체제와 억압적 통제체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긴급조치 발동으로 박정희에 대적하는 인재들이 체포되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이로써 박정희를 황제로 만드는 두 번째 음모가 성공하였다. 이게 1972년 오늘 있었던 유신헌법, 곧 유신체제의 진실이다.(2011. 10.17,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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