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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휴전협정의 역사적 의미를 재검토할 때가 아닌가 2

by anarchopists 2019. 12. 1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7/26 07:33]에 발행한 글입니다.


휴전협정의 역사적 의미를
재검토할 때가 아닌가 2

그러면 이제, 6,25전쟁이 우리에게 준 상처와 휴전협정이 성립되게 된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전쟁은 어찌했던 인간의 나쁜 행동 중에 가장 나쁜 행위이다. 아이들이 감정을 가지고 싸우는 것도 나쁘다. 어른들이 치고 박고 싸우는 것도 나쁘다. 양식과 교양이 없는 청장년들이 폭력집단(이를 흔히 깡패, 또는 깡패집단이라고 한다)을 만들고 이유 없이 사람을 납치하고 길거리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짓도 나쁘다. 다구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권력연장과 경제목적)을 위하여 나라의 인민을 희생시키는 전쟁은 더더구나 나쁜 짓이다. 한반도의 6.25가 그렇다.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듯이 6.25는 분명 한반도 독재적 분단세력들이 1950년대 냉전을 이끌고 있는 외세의 교묘한 술수에 이용당한 전쟁이었다. 나라 안팎의 인민들도 억울한 희생을 당한 전쟁이었다. 그것은 이승만이 맥아더 장군에게 작전통제권을 이양(1950. 7. 14)한 데서도 드러난다. ‘군사작전권’은 한 나라의 생명이다. 이 생명선을 어찌 다른 나라에 이양한다는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러면, 냉전외세와 분단세력 때문에 일어난 6,25가 남긴 희생들을 상기해 보자. 통계수치를 보자. 한반도 남북전체로 볼 때, 무기를 들지 않은 민간인 사망이 77만 여명, 부상 182만 여명, 실종 106만 여명이며, 군인은 사망 65만 여명, 부상 67만 여명, 실종 11만 여명으로 총 피해는 510만 여명을 헤아린다. 외세의 경우 자유주의연합세력에서 파견한 군인과 사회주의연맹세력에서 파견한 군인을 합해서 볼 때, 사망 14만 여명, 부상 33만 여명, 실종 3만6천 여명이다.(자료: 내무부 통계국, 대한민국 통계연감, 1995, 212~213쪽,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피해통계집, 1996, 144쪽) 당시 한반도 총인구를 약 3천만 명이라고 할 때 이는 약 1/5이 피해에 해당된다. 참으로 가혹한 전쟁의 참상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한 가족(5인 기준)에서 1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가나 실종되었다는 말이다. 수치상으로 볼 때, 6.25의 참화 속에서 한반도의 모든 가정이 가족을 잃거나 팔 다리를 잘린 부상과 실종으로 통곡을 하였다는 말이 된다.

6.25는 인명피해 말고도 먹고사는 문제에도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 즉 경제적 측면이다. 남북이 모두 합하여(북의 피해가 더 크지만) 산업기반이 거의 80% 이상이 파괴되었다. 전력손실도 거의 70%나 달한다. 그리고 주택시설도 30% 이상이 파괴되었다. 이것은 곧 아비규환(阿鼻叫喚)이다. 전쟁 이후 한반도 사람들이 먹고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6.25는 한반도 인민들에게 고통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안겨주었다. 이에 대한 보상(전쟁을 했으면 어찌 했던 남북통일은 있었어야 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처럼.) 전쟁당사자들이 자기네의 필요에 의하여 ‘휴전’이라는 과정을 만들기 시작했다. 휴전 또한 한반도 인민들의 바램이 아니었다. 전쟁당사자들의 음모였다. 즉 한반도의 영구적 분단의 음모였다.

이제 휴전의 과정을 알아보자. 6.25는 미국이 주도의 자유주의연합세력(UN의 이름으로 결집됨)이 한반도에 즉시 투입되면서 중국 중심의 사회주의세력들도 이에 대응하여 한반도에 투입되었다. 6.25의 본질이 당시 냉전체제의 희생이라는 말이 여기서 입증이 된다. 전쟁의 양상은 남북의 분단세력들이 주장하였던 남북통일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냉전의 실체로서 대리전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야 할 분단세력 이승만은 통일을 위한 명분전쟁을 버리고 정권연장을 위한 전쟁으로 6.25의 성격을 바꿔버렸다. 잠시 이승만의 태도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승만이 전쟁에 광분하자, 의열단원(義烈團圓, 柳時泰)의 암살계획과 실행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의 퇴임기운이 일게 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1951.12.23)하여 당에 의한 장기집권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재에 대해 의회의 저항(의원
내각제 제출)이 있게 되자, 이승만은 이에 대응하여 비열하게 계엄령 선포, 야당의원의 체포 감금한 상태에서 정치적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발췌개헌(拔萃改憲; 대통령 직선제안)인 부산파동이다.(1952. 7.4) 다시 말하면, 이승만은 전쟁의 참상이 말할 수 없는 그 시점에서도 자신의 권력야욕에만 눈이 어두웠다는 말이다. 신채호에 의하면, 이승만은 애당초 민족의 주권이나 나라의 자주에는 관심이 없는 자였다. 임시정부 시절 신채호가 이승만을 평가한 말을 잠깐 들어보자.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리승만은 리완용이나 송병준보다도 더 큰 역적이다. 리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리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 하지 않느냐! 그런데도 그를 우리의 대표라 할 수 있단 말이냐?”(김성룡, 서프리이즈 2010.11.17.일자)

이렇게 남이 독재권력 장악에 광분하고 있을 때, 냉전의 두 축이었던 소련과 미국은 6.25의 휴전을 밀의(密議)하고 있었다. 중국군의 6.25전선 투입(1950.10.25)으로 사회주의연맹세력의 주도권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꺼려했던 소련이 비밀리에 미국에 휴전을 제의하였다.(1951.6.23) 이렇게 해서 휴전교섭이 이때 미국정치상에 변화가 온다. 곧 미국 대통령선거다.(1952.12) 그 결과 한국전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의 등장이다. 이러한 냉전주축국의 국내 사정과 자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6.25는 남북통일노선이 아닌 전쟁종결노선으로 바뀌게 되었다.(2011. 7.26 아침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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