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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휴전협정의 역사적 의미를 재검토할 때가 아닌가 3

by anarchopists 2019. 12. 1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7/27 08:53]에 발행한 글입니다.


휴전협정의 역사적 의미를
재검토할 때가 아닌가 3

6.25종결을 위한 노력은 자유주의세력권에서 먼저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인민군이 “항미원조”(抗米援朝; 미국에 대항하기 위한 북조선 원조)의 명분으로 6.25에 투입된 직후에 미국과 영국이 워싱턴에서 회동을 한다(1950. 12, 미국의 트루먼(Truman. H.S.) 대통령과 영국의 애틀리(Attlee,C.) 수상 사이) 여기서 6·25를 평화적으로 종결할 것을 논의한다. 이의 합의로 6.25휴전협상을 위해 유엔총회에서 3개국협상단(인도·이란·캐나다) 구성안이 통과된다(1950. 12. 14) 그러나 6.25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던 사회주의세력의 반대로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전쟁은 가급적 신속히 해결한다.”(김일성과 북경회담, 1950. 12.3.)는 원칙 하에 “변타변담‘(邊打邊談, 전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담판을 한다)의 전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자유주의세력권은 다시 6.25의 정전결의안을 유엔에 상정하여 통과시킨다.(1951. 3) 그 내용은 “현 상태에서 즉시 정전한다. 휴전기간중 한국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한다. 외국군은 적당한 단계를 거쳐 철수한다. 대만문제와 중공의 유엔 가입문제는 미·영·중·소 4개국이 협의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역시 중국의 반대로 무산이 되었다.

휴전회담은 6.25전선의 진퇴양상과는 사실 무관했다. 휴전회담은 당시 냉전체제의 두 주축국인 소련과 미국의 같은 이해관계와 중국의 ‘변타변담’의 전략 때문에 가능하였다.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세력권의 패권을 계속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흥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을 견제해야만 했다. 그런데다 사회주의세력권의 맹주 스탈린((Stalin, 1878. 12~ 1953. 3)이 이끄는 소련에 정치적 혼란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과 북조선인민군 연맹세력이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에 놀란 소련은 중국인민군이 6.25전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는 없었다. 소련의 위상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6.25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하여 휴전회담을 미국에 제의하게 된다.

미국 또한 신흥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의 위력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중국 대륙이 중국공산당에 의하여 공산화되었듯이 잘못하다가는 한반도의 공산화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런데다 전쟁반대론자인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선에서 당선되었다. 이에 미국은 전쟁확대론을 주장하는 유엔군사령관 메카시(D. Macarthur: 흔히 맥아더로 불린다)를 해임한다. 그리고 일단은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기 위해 총공세를 취하는 한편, 소련이 제의한 휴전회담을 즉각 수락하였다. (1951. 6.30.)

이후 휴전협상을 위한 예비회담(1951. 7.8 개성)을 열은 뒤 본회담이 시작되었다.(7. 10, 개성시 고려동 來鳳莊) 그런데 휴전협상의 대표는 남과 북의 교전당사자가 아니었다. 이게 훗날 문제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휴전협상 대표에 한국군의 대표와 북조선의 대표가 마주앉아야 함에도 이승만은 계속 북진통일만을 주장하고 휴전회담을 반대하였다. 한심한 존재였다. 휴전협상에서 교전당사자인 남측대표가 빠진 것은 이승만의 뜻이었다. 이승만은 “우리 측이 휴전당사자로 참석하지 않는 것은 휴전 이후를 유엔, 즉 미국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구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승만이 미국에게 작전통제권을 넘겨주었기에 휴전협상의 당사자가 될 수 없었다. 만약 이승만이 자기가 주도하는 남북통일을 할 줄 알았다면, 그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러자 미국은 이승만을 달랬다.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 체결, 장기간 경제원조, 한국군 증강” 등 달콤한 사탕을 주었다. 이승만은 얼론 받아먹었다. 대통령이라는 이승만이 정말 몰랐을까. 이것이 뒷날 한국을 미국의 군사ㆍ정치ㆍ경제적 종속국으로 전락시키리라는 이치를. 이것을 몰랐다면 그는 한심한 작자이다. 오늘날 이 나라에 군사주권, 주체정치, 자주경제를 상실케 만든 장본인은 바로 이승만이다.

휴전회담은 중단과 재개 등, 우여곡절 끝에 소련의 스탈린 사망(1953.3), 미국의 아이젠하워의 집권(1953.1) 등 국제정치사회의 변화와 함께 급진전되었다. 한반도 남측 대표가 빠진 휴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타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이렇게 휴전협정의 체결 당사자는 교전의 주체였던, 그리고 통일의 주체
였던 한반도의 주인인 남과 북이 아니고 북조선ㆍ중국과 미국(형식은 유엔군)이 되었다. 이 때문에 한반도 통일을 위한 과정에서 휴전협정이 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북이 남을 제외시키고 미국과 담판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해서 6.25을 잠시 중단시키는 정전협정은 북조선수석대표 남일과 미국(형식은 유엔대표)의 수석대표 해리슨(W.K. Harrison)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정서와 부속문서에 서명하였다. 뒤에 조선인민군총사령관 김일성은 평양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은 후방사령부가 있는 개성에서 각각 서명하였다. 한반도 남측을 대표하는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사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김일성도 휴전협정의 당사자로 이승만을 지목했어야 함은 물론,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역사에 죄를 지었다는 말을 휴전협정에다 남겼어야 했다.

휴정협정의 내용은 평화협정이 아닌, 한반도에서 전투행위와 무력행동의 완전종결을 목적으로 하는 정전의 성격을 갖는다. 결국 휴전협정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영원히 잠재우는,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한 평화협정이 아니었다. 객식구들의 빚잔치 마당이었다. 남북 각각의 분단세력들의 어처구니없는 잘못은 이후 민족통일의 어두운 그림자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검토를 통하여 교훈을 남겨본다. 자기 이익에만 충실한 분단세력과 갈등확대세력들이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인민(the people's)과 후대 역사에 오욕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2011.7.27. 아침,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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