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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취래원 농사 칼럼

교회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by anarchopists 2019. 12. 17.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7/15 06:44]에 발행한 글입니다.


교회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가톨릭을 중심으로-

1. 《성서》,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창세기 1: 31) 그런데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는 아주 간단하다. 신은 지선(至善) 자체로 만물의 주제자로 신격체(神格体)로 무한존재이다. 이에 비하여 인간은 선악(善惡) 모두를 가지고 있는 '인격체'로 유한적 존재다. 인간이 하느님과 구분이 되고 유한적 존재가 된 까닭을 성서를 빌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인간을 만들고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한 가지 약속을 요구하였다. “善惡果를 먹지마라” 그러나 인간은 영악하고 교만한 존재이다. 그래서 사이버인간처럼 신과 같아지려는 교만함을 보였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다. 하느님과 약속을 깼다. 그리고 악을 보게 되었다.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잊고 하느님의 품을 떠났다. 그리고 自己意志와 情慾을 존재방식으로 삼는 ‘육적존재’가 되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사망’이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지며 스스로 판단을 내려한다. 곧 ‘사고의 유한’이다.

이 영적사망의 상태는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죄를 범하도록 부추긴다.(<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12). 인간이 이 상태 속에 머무는 한 끊임없는 죄(이기주의와 자기욕망) 속에 살게 된다. 때문에 인간 세상에는 억압, 투쟁, 비참, 전쟁, 비극, 절망, 고통, 괴로움, 슬픔 등이 있게 된다. 곧 이것들은 죽음 자체를 의미한다. 죽음이란 하느님과 연결된 생명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생명줄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결국 육체는 병들고 시든다. 육신이 추악해서 선한 영혼이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면 영혼은 육신을 떠나고 인간은 형태상 ‘자기소멸’을 한다.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원죄 이후 인간이 사망에 이르게 되자. 하느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겨 우리의 영혼이 죽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주었다. 바로 구원(救援)이다. 하느님은 구원의 방법으로 교회를 통한 성사를 계시하였다. 성사는 신의 대리자인 예수를 통하여 베풀도록 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제자인 성직자들에게 聖事執典權을 주었다. 그리고 성직자는 죄의 보석으로 이웃에 대한 선행을 하도록 하였다. 때문에 가톨릭의 가르침은 성사(聖事)와 선행(善行)이다.(13세기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4/25~1274의 가르침) 이 선행 때문에 가톨릭신자는 사회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다른 종교에 비하여 가톨릭이 양로원, 병원, 고아원 등 사회시설을 많이 만들어 선행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성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는 신의 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다. 이것을 교회가르침에서는 공생활이라고 한다. 그의 공생활 목적은 타락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 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공생활 동안 왕직(王職), 사도직(使徒職), 예언직(豫言職)을 수행하셨다. 이 중에서 예언직이란 세속의 어려운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 예언직은 매우 어려운 직무다. 그렇지만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고대 유럽과 소아시아 인류를 말함)이 직면하고 있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가 천당으로 돌아간 이후 성령과 함께 예수의 공생활을 완성하고자 실천하였던 자들이 그의 제자들이었다. 그 제자의 뒤를 계승하고 있는 분들이 지금 가톨릭의 사제이고 개신교의 신부, 목사이다. 그래서 천주교의 사제는 예수의 불혼(不婚)상태를 유지하며 성적 고통을 인내한다. 그리고 예수의 예언직 수행을 본 받아 우리 사회에 놓여 있는 어려운 정치문제ㆍ사회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고 대안제시와 함께 몸을 던지기도 한다. 바로 민주화온동, 인권운동, 4대강개발반대운동 등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군사독제권력이 판을 칠 때, 인권이 유린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국가보안법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는 비극적 상황에 맞서 천주교 사제들이 결연히 독재권력과 싸웠다. 심지어 감옥까지 갔다. 그 결과 이 나라에 민주화가 어느 정도 성취되지 않았던가. 이 나라가 민주국가가 되고 자유를 누리며 인권이 신장된 데에는 천주교 사제들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런데 IMF 이후 이 나라는 다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논리에 의해, 모든 분야가 경쟁사회로 돌입하게 되었다
. 자본주의의 경쟁논리는 빈부(貧富)ㆍ강약(强弱)ㆍ우열(優劣)의 양극화를 심화시켜 놓는다. 돈 있는 자와 힘을 가진 자 그리고 능력이 있는 자는 살아남고, 가난한 자와 힘이 약한 자 그리고 못난 자는 죽는 사회가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이다.

예수가 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해야했는가. 생각해 보자. 바로 가난하고 힘없는 약한 바리세파를 돕다가 그리 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다. 예수를 따르고 그의 길을 가겠다고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면 두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는 예수의 뒤를 따라,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를 돕는 일이고, 하나는 ‘하느님이 창조한 그의 자연질서를 보존하는 일이다. 그래서 천주교가 ‘우리농촌살리기’, ‘환경보호’, ‘노동사목’을 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용산철거민 돕기’, ‘4대강개발 반대’, ‘강정마을 해군기지설치 반대’를 벌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모두 제2의 예수가 되면 이 사회는 살맛나는 세상이 되리라는 확신을 갖는다. 이글을 천주교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쓴다. 이제는 죽어가는 우리 농촌과 농민을 돕자. (2005.7월 초안, 2011.7.15. 다시 쓰다, 취래원농부)

취래원농사는
황보윤식(皇甫允植, 醉來苑農士)
학생시절부터 민족/통일운동을 하였다. 동시에 사회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나이 60을 넘기자 바람으로, 도시생활을 과감히 접고 소백산(영주) 산간에 들어와(2010) 농업에 종사하면서 글방(書堂, 반딧불이서당)을 열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를위한시민모임”, "함석헌학회" “함석헌평화포럼”, “함석헌평화연구소”에도 관여를 하고 있다. 글로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2017) 등 다수의 글이 있다.(수정 2018. 10.3) /함석헌평화연구소

* 본문 내용 중 사진은 인터넷네이버(위 사진)과 뉴시스(아래사진)에서 따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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