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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함석헌 새로 읽기-자항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by anarchopists 2020. 1.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6/18 15:39]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 새로 읽기-김영호]


저항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 인격은 선악의 두 언덕을 치며 물살을 일으켜 흘러나가는 정신의 흐름이다. 물이 언덕은 아니요, 인격이 선악도 아니다. 그러나 흐름은 두 언덕을 쳐서만 있는 것이요, 인격의 발전은 선악의 싸움을 해서만 있다. 선이 무언가?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요. 악이 무언가? 그 자유를 방해하는 밖에 다른 것 아니다. 사람은 악과 맞서고, 뻗대고, 결러내고, 밀고 나가서만 사람이다.

-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 맞서는 것이 아들이다. 환웅(桓雄)은 환인(桓因)을 떠나 인간세계에 뜻을 두었고 석가는 정반왕(淨飯王)을 버렸고 예수는 요셉, 마리아를 내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천지창조하려는 하나님이 물위에 운동하셨다는 그 운동은 무슨 운동이었나? 반항운동이었다.

여태까지 이 시리즈에서 함석헌의 말씀과 사상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이 이런저런 해설을 했다.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었으면 다행이다. 순서가 뒤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그것과 함께 그의 말씀을 직접 읽어보는 일이 중요하다. 원래 이 시리즈도 함석헌의 말을 맛보이자는 의도였다. 이해의 과정에서 어쩌면 학자들의 말은 군더더기다. 학자들은 같은 말도 복잡하게 어렵게 만드는 성향이 있다. 어렵고 추상적인 말로 먹칠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먹물이라고 하는가. 강단학자는 순기능만 하는 게 아니다. (정권의 시녀가 된 검찰과 짜고) 언론매체가 노무현을 죽인 것처럼 언론과 학자가 매체로서 함석헌의 정신과 뜻을 죽일 수 있다.

함석헌은 난해하고 추상적인 말을 쓰지 않았다. 몸속에서 순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말을 그대로 뱉어낸 것이 말씀이요 글이었다. 그의 말은 생각 없이 하는, 늘 자기(ego)라는 관념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이기적인 일상 말이 아니다. 그래서 말씀이라 할 만하다. 말씀이 중개자(미디어) 없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를 탈바꿈시킬 때에야 말의 뜻과 가치가 들어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글을 직접 읽어보자는 것이다. 최근 함석헌저작집(30권)이 새로 나온 터이다. 이 시대 이 시점에서 새로 읽어야 한다. 순서 없이 아무 데고 펴서 보면 깨우침을 일으킨다. 처음 걸려든 주제는 ‘저항’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딱 들어맞는다.

- 하나님은 스스로 나오는 이, 스스로 폭발하는 이, 그러기 위해 스스로 맞서고 뻗대고 결러내는 이다. 스스로 노여워하는 이다. 영원의 미완성이다. 모세가 담대하게도 그 이름을 묻고 대들었을 때 그가 하신 대답은 이름이 없노라 하는 것이었고, 할 수 없이 한 가칭이 “나는 있으려 하는 자”(여호와)였다.

- 이 우주는 자치하는 우주란 말이요, 이 생명은 자유하는 생명이란 말이다. 하나님은 결코 내정간섭을 하는 전제군주가 아니다. 그는 하는 것 없이 안방에 누워 있으면서 무르는 것이 없고 아니 하는 것이 없는 아버지다. 자유야말로 생명의 근본 바탈이다. 진화(to evolve)하는 것이 생명이다. 생명이 진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는 혁명적(to revolve)이 아닐 수 없다. 역사가 혁명의 과정이라면 인생이 어찌 저항적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런데 거리를 내다보면 어찌 그리 죽은 고기떼같이 밀려 내려가는 인간이 그리도 않으냐? 그게 어찌 인간이냐? 찌꺼기가 밀려 막혀 썩는 하수도 구멍같이 이 사회에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어찌 그리 한밤중에 미꾸라지를 쥐는 것같이 불쾌하냐? 어떻게 되는 세상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 남들이 너를 욕해 비겁한 국민이라 하더라. 누르면 진흙처럼 언제까지도 빠져드는 인간들이라 비웃더라. 나약(懦弱)의 숭배자라 깔보더라. 그리고 어찌 살 수 있느냐? 무저항주의라고 아는 체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그것은 사실은 저항의 보다 높은 한 방법뿐이다. 바로 말한다면 비폭력저항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한 예수가 그렇게 맹렬히 악과 싸운 것을 보아라. 말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늘에 올라가도 저항, 땅에 내려와도 저항, 물 속에 들어가도 저항, 허무 속에 가도 거기 스스로 일으키는 회오리바람 속에 버티고 있는 하나님이 있는데 너만이 저항을 모른단 말이냐?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내가 너를 박차, 너를 살려 내고야 말리라. (「저항의 철학」, 1967년, 전집2)


이 땅에서 우리가 맞서야 할 악은 무수하다. 우선 혈연, 지연, 학연 등 세 악연(三惡緣)에다 국가폭력, 언론폭력, 종교폭력, 재벌폭력, 교육폭력 등 물리쳐야할 폭력이 난무하는 요지경사회이다. 민주주의가 역행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곱씹어봐야 할 말씀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인격자도 잘 안 보이고 국격(國格)도 없다. 국가지도자를 쳐다보면 더 실감이 된다. 이외에도 함석헌의 여느 글처럼 이 글에는 또한 ‘진화’, ‘생명’ 등 생각거리를 주는 여러 주제와 화두가 들어 있다. 저항하는 사람이라야 참 인격이다! 저항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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