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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법정스님이 남긴 것- 종교라는 이름으로 혹세무민하지 마라

by anarchopists 2020. 1. 2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3/16 06:00]에 발행한 글입니다.


법정 스님이 남긴 것

‘무소유’의 상징 법정 스님이 열반했다. 물질의 축적과 향유 말고는 별다른 가치지향이 없는 사회에서 마지막 의존할만한 어른을 잃은 셈이다. 그는 구태여 이런저런 말을 안 해도 어딘가에 생존해있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위안을 받을만한 그런 분이었다. 기술의 발달로 생활이 편리해진다고는 하지만 날로 필요 이상으로 더욱 복잡하고 날로 더 사치해지는 사회에서 그는 행복이 단순하고 소박한 삶 속에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동시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제시해주었다.

비록 한 전통종교의 틀 속에 있었지만 조직의 권위에 편승하거나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지 않았다. 큰 절(송광사)에서 자기만의 수행공간을 누리다가 그것마저 부담스러워 훌훌 박차버리고 강원도 산골에서 고고하고 소박하게 살면서 가끔 그가 창건한 서울의 길상사에 가서 법문을 베풀곤 했다. 송광사로 말하면 한국사찰의 대표인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로 국사와 걸출한 승려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본산으로서, 조계종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보조국사 지눌이 일으킨 불교운동(결사)의 중심지였다.

그는 그러한 전통과 조직의 무게조차 버거워 내치고 떠난 것이다. 영향력에서 송광사와 쌍벽인 해인사의 성철 스님이 지눌의 주장을 비판하는 불교수행방법론의 논쟁(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이 한창일 때 (필자도 참여했지만) 그는 송광사 쪽을 대표하는 보조사상 연구소장이었다. 그것은 마치 종권 다툼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러한 것조차 역겨워 했을 법하다.

산골에 은거했다고 해서 그가 소승적인 수행으로 되돌아 간 것은 아니다. 다양한 저술과 역서 그리고 법문을 통해서 대승적 중생교화와 자비행을 버리지 않았다. 보살수행자로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상구보리하화중생)하는 대승도를 걸었다. 그는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드문 승려였다. 함석헌 선생이 주도하는 민중운동에 동참하여 [씨알의 소리]에 글을 쓰고 그 잡지와 [함석헌전집] 편집위원이기도 했다. 그 잡지를 혁신하여 새로 내면서, 우리는 2008년 그가 와병 후 오랜만에 길상사에서 법문할 때 그에게 글을 청탁하러 가서 뵌 적이 있다. 글 대신 그의 법문을 그대로 실었는데 그것은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로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무소유’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틱낫한 스님의 핵심 메시지가 ‘정념(正念)’에 들어있는 것처럼 ‘무소유’ 속에 불교의 핵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비폭력 원리를 가장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실천한 자이나교도 무소유를 주요한 계명으로 삼았다. 무소유는 무집착과 동의어이다. 소유는 곧 집착이기 때문이다. 많이 소유할수록 물질에 대한 집착은 더 커진다. 물질에 그치지 않고 물질로 명예와 권력까지 거머쥘려고 하는 사람이 들끓는 세상에서 무소유는 키워드가 된다.

무집착은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핵심인 연기(緣起)의 원리에서, ‘무명’에서 ‘노사’(老死)에 이르는 12가지 항목에서 집착(取 즉 執取)에 해당한다. 이것을 없애면 연기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곧 해탈, 열반에 이를 수 있다. 그것만 끊으면 다른 수행이 더 필요 없다. 명상, 참선, 자비도 그것이 목적이다. 집착이 없으면 무아, 공(空)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가장 강한 집착이 ‘나’에 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이 시대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는 도구로 삼고 몸소 실천했다. 그의 인상은 그런 모습으로 여느 종교인과는 유다른 기품을 풍긴다. 어떤 사람의 가치와 진면목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로 측정 된다. 연전에 방한한 틱낫한 스님의 얼굴도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는 인상이었고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달라이 라마도 색다르게 보였다. (세계제일의 부자라는 빌 게이츠의 인상도 우리나라 재벌들의 탐욕스런 얼굴과 뚜렷이 대조될 정도로 밝고 무욕하게 보인다.) 법정 스님이 불법에 처음 귀의할 때 은사인 효봉 스님의 전법제자인 구산 스님도 (달라이 라마 이상으로) 그렇게 청정하고 순수한 기품을 발한 분이었다고 외국인 수행자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 무소유의 귀감인 효봉-구산-법정의 법맥이 잘 이어졌으면 좋겠다.

조직종교가 점점 더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적 행태로 빠져들고 있는 이 때에 법정 스님의 열반은 하나의 경종을 울려준다. 성철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경우와 비슷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소유의 삶을 철저히 실천한 분들이었다. 법정 스님의 삶과 열반은 사치스런 형식주의와 미신에 빠진 종교 풍토에 제동을 건 사건이다. 입은 그대로 불사르고 사리도 줍지 말고 부도도 만들지 말라고 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거기다 ‘열반계’ 형식의 유언도 없었다. 직계제자들도 많이 거느린 것 같지 않다. 사리에 대한 신앙은 창시자 석가모니와는 무관하게 후대에 생겨난 미신이다. (수많은 석가의 진신사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모든 의례와 형식의 덧씌움을 걷어 버리고 참 종교의 알짬에 돌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히 물질과 육체의 미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락에 빠질 것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혹세무민하는 자들은 죄 값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긴 법정스님의 가르침이다.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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