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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함석헌학회] 함석헌의 한국 기독교 비판과 순령주의(純靈主義) 3

by anarchopists 2020. 1. 1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26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2.1 1950년대 초기 저작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이해

「새 시대의 하나님」은 1951년에 쓴 글이니까, 한국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전쟁 통인데도 함 선생님은 새 시대가 시작됨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새 시대에 대한 의식은 1950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초판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문제를 당하고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전연 새로운 어떤 것이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의 되어가는 식양(式樣), 나라들의 상태, 과학의 발달되어 가는 형세, 이 모든 것은 오직 일점을 향하고 있다. 어떤 새 것, 공산주의는 결코 세계 문제를 해결 못할 것이다. 미국식 민주주의도 아닐 것이다. 지금의 그리스도교를 가지고도 안 될 것이요, 기타 현존한 어떤 것을 가지고도 안 될 것이다. 인류는 지금 근본적으로 새로운 무엇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고는 지금 있는 것으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벌써 시험제인 것인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혁명이 필요하다. 정치 혁명이 아니다. 무력에 의한 혁명이 아니다. 기술의 혁명이 아니다. 기술 인간이라던 말은 기술 그 자체에 의해 막다른 골목에 들어갔다. 심정의 혁명이다. 혼의 혁명이다. 인생 그것이 고쳐 남이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 서울: 신생관, 1960년 개정판, 245-6)

같은 정신에서 함 선생님은 그 이듬해인 1951년에 쓴 「새 시대의 하나님」이란 글에서, 새 시대, 곧 ‘평화시대’(16: 292)를 위해 새 정신, 새 종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새로이 하나님을 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16: 291). 새로운 예배, 참 예배, 참 신앙 문제를 여기서 문제 삼고 있습니다. 다른 논의에서도 전형적으로 드러나듯이 여기서도 함 선생님은 일종의 역사 발전의 틀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계신 자리가 어떻게 변화, 발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과거 하나님을 섬길 때는 시온산, 시내산, 백두산이었지만 산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하나님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16: 292)이 되었다가 이제 예수의 오심과 함께 예수가 보신 하늘은 저 푸른 하늘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신 하늘이 되었습니다(16: 292)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씀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나란 예수 일뿐만 아니라 인격이요, 정신이며, 마음이며, 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함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격이야말로 하늘이 아닌가. 저 하늘처럼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있으면서도 없는, 알 듯 하면서도 알 수 없는 하늘이 아닌가. 예수는 그것을 영이라 하시고 영원의 생명이라 하시었다. 하늘이라 하시었다. 그는 거기서 볼 수 있는 세계만 아니라 볼 수 없는 세계까지 다스리는 하나님을 보았다. 그의 하나님은 상대의 하나님이 아니요 절대의 하나님이었다. 그의 하늘은 하늘 아닌 하늘이었다. 그러니 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적으로, 참으로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16: 295).

여기서 우리는 함석헌 선생님의 한국 기독교 비판의 근본을 보게 됩니다. 만일 여기 담긴 주장이 참이라면 누구나 혼으로서, 정신으로서, 자각이 있을 때 그곳에서 곧 하나님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천당의 하나님은 너무 협소하고 작은 하나님입니다. 아니, 아예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도 여전히 ‘하늘’이란 말을 썼지만 이 때 하늘은 일종의 시적 상징으로 부호로 예수께서 썼습니다. 예수는 함 선생님의 눈에는 시인이었습니다(16: 296 참조) 시인 예수가 본 하나님은 푸른 하늘보다 “훨씬 더 높이 계신 이”였습니다(16: 294). 더 높은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영이요, 혼이요, 마음이요, 정신이요,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 안에서, 정신 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예배하자는 말입니다. 함 선생님은 좀 더 드러내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늘 아닌 하늘, 우리 혼 안에 있다. 절대의 하나님 그 자체야 우리가 이러니저러니 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맘에 있다, 정신에 있다, 인격에 있다. 고로 맘이 청결한 자 하나님을 본다 하였다. 맘은 자주 껍질을 걷어내어야 맑을 수 있다. 하늘이 저 푸른 하늘이 아니라 마음임을 깨닫는 것, 마음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시작한 것이 다름 아니라 예수의 ‘혁명’이었습니다(16: 295).

1951년 글에서 예수의 혁명을 혼의 혁명, 정신 혁명으로 본 것은 말년까지도 바뀌지 않습니다(끝부분에 가서 이 점은 다시 보겠습니다). 앞에서 잠시 말했듯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1950년 출판본)에서도 이미 혁명은 “심정의 혁명이다. 혼의 혁명이다. 인생 그것이 고쳐 남”이라고 했습니다. 1980년대 민중신학자들이 예수를 일종의 정치 혁명가로 보려고 한 것에 대해 함석헌 선생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일으킨 혁명은 혼의 혁명이며 정신의 혁명이라고 끝까지 주장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정신주의, 물질을 삶과 존재, 생명의 원리로서 수용하기를 일관되게 끝까지 거부하는 정신주의를 이미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무신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신 속에 계심을, 혼과 인격 속에 계심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는 ‘물’(物)을 하나님으로 삼는 이들입니다. 말하자면 물신(物神) 숭배자들이 곧 무신론자들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을 만물의 근본이요, 원리요, 귀착점으로 믿는 것처럼 물신 숭배자들은 ‘물’을 그렇게 믿습니다. ‘물’에 치여 죽으면서도 물이 하나님인줄 믿고 반역도, 불평도 않는 것이 무신론자들의 실상이라고 함 선생님은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 함 선생님은 기독교 신자들에 대해서 “실생활에선 저희도 물의 종교의 신도다”라고 말합니다(16: 296). 입으로는 기독신자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물신 숭배를 하는 무신론자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칸트는 ‘실천적 무신론자,’ ‘현실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라고 부릅니다. 이 말을 함 선생님은 쓰지를 않았지만 기독 신자도 물의 종교의 신도란 말은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렇게 된 기독신자들은 결국 [이론적] 무신론자들조차 잃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과학적 지식으로 인해서 점점 교회 신앙과 불화를 일으킨 사람들은 차라리 무신론자가 되어 교회를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함 선생님은 그들을 물론 옳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물질에 의존한 현대 과학적 세계관을 토대로 한 무신론은 오래 가지 못하리라 짐작했습니다. 기독신자들이 좀 더 포용적인 자세를 갖자는 말을 함 선생님은 하시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변화된 세계관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물질에 얽매이는 무신론자를 교회가 포용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의 낡은 세계관을 가지고 하늘을 마치 ‘저 푸른 하늘’이라고 고집한다고 한국 기성신자들을 함 선생님은 나무랍니다.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이론적] 무신론자들에게 진정 참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자는 주장입니다. “그들을 무신론자라 믿지만 말고 그들에게 정말 하나님을 보여주도록 힘써야 할 것 아닌가”라고 말합니다(16: 297).

그래서 함 선생님은 이제 새 집을 짓자고 제안합니다. 새 집은 곧 새 종교, 새 하나님, 새 신앙입니다. 오히려 오늘의 무신론자들이 예수 시대 창기와 세리처럼 하나님의 새로운 터가 있을 자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에는 더러울 듯 한 데 거기가 좋다고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가신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텅 빈 옛 전당의 음음한 기운만이 남는다. 새 집을 짓자. 하나님을 새로이 모실 새 집을, 새 집에는 낡은 물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새 시대의 종교는 순정신적(純精神的)이어야 한다. 그래야 참일 수 있고 자유일 수 있고 평등일 수 있다. 이 회오리바람은 우리에게서 진공만이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그러나 새 집에는 평화의 즐거움과 거룩함이 있을 것이다. 새 시대의 종교는 무신론자를 포용하는 종교일 것이다(16: 297).

1951년의 글입니다. 전쟁이 진행되던 당시 상황을 단지, 이 땅의 상황으로만 보지 않고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았던 함 선생님은 “아침 저녁 뒤져 그 중에 자란 가장 아름다운 경전. 가장 깊은 교리 가장 굳은 신조를 사정없이 잡아내어 , 새 시대의 하나님의 재단 앞에 살라버려야 한다, 네 영혼을 회오리바람의 중심에 붙들어 매려 애를 써라. 거기 새 시대의 하나님의 보좌가 있을것”이라고 서두에 던졌던 말의 맥락에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16: 291-2). 함 선생님은 한국교회의 내세 천당론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순전한 정신적 하늘, 그 분의 말씀대로 ‘순정신적’ 하늘론을 펼칩니다. 기독 신자의 실천적 무신론으로 이어지고 그리고 마침내는 이론적 무신론자까지 포용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자고 역설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몰라도 정말 계신다면 저들에게 하나님을 못 보여줄까. 넓은 세계를 보려하면 높은 곳에 올라야 한다. 하나님을 잃고 헤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뵈도록 하려면 교회를 어제보다는 훨씬 더 높은 터 위에 다시 짓지 않으면 안 된다.(16: 295)

그런데 이 높은 터라는 것이 바로 ‘역사의 쓰레기 통’이요 무신론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오늘 교회가 그곳까지 낮아져야 진정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는 말을 『저작집』16권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에 실린 글 가운데 가장 일찍 쓴 글에서 함 선생님은 벌써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실 기독 신자들이 실제로는 무신론자들이라면 순정신적인 기독교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론적 무신론자를 포용하면서 실천적, 현실적 무신론자는 배격합니다. 진정 참된 유신론자가 아니고서는, 실제로는 무신론자로 머물러 있으면서는, 이론적 무신론자들을 감화시킬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강영안 화요일 계속)

강영안 선생님은
강영안 교수님은 경남 삼천포에서 자라나셨다. 네덜란드(和蘭) 자유대학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교수로 재직 중이시다 [주체는 죽었는가? 타인의 얼굴, 자연과 자유 사이, 철학은 무엇인가? 강영안 철학이야기] 등 주옥한 같은 철학 저서를 출판하여 한국 철학계의 거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윤실(기도교윤리실천워원회)의 총무와 대표를 역임하였다. 특히 기독교 서적으로는 사도신경강해에 해당하는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과 [강영안교수의 십계명 강의]를 출판하였는데 매우 권위 있고 박학다식한 기독교 지식과 논리가 용해되어 있습니다. 현재 학술연구재단의 역사철학단장으로 임명되어 대덕 한국연구원 역사철학 과장으로 파견 근무 중에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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