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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함석헌학회] 함석헌의 기독교비판과 순령주의 5

by anarchopists 2020. 1. 1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28 06:58]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기독교 비판과 순령주의

2.3 80년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이해

이제 저의 논의의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저작집』16권에 실린 글 가운데서도 가장 후기에 속하는 「믿음의 내면화」(1982년)라는 글(강연)에서 좀 더 분명한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이 글은 내면화 문제를 앞에서 다룬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다룹니다. “내면화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함 선생님은 먼저 성경에서 그 말을 끄집어내자고 제안합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그랬어요. 여기서 “너희 안에" 하는 그 ‘안’이라고 하는 말, 메소스(μεσος)의 의미를 알아야 돼. 우리말로 한다면 그걸 영어의 Among You 하는 것과 In You 하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어. ... 요새 교회가 지금 사회 문제로 싸움하느라, 안병무 박사 같은 이는 이걸 Among You로 취해야 한다고 그래요. 물론 두 가지를 다 취해야 해요.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In You라고 봐요.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그건 바로 하늘나라는 우리 정신, 영적인 데 있다 그 말이야. 그런데 그 ‘안’이란 말을 among이라고 그러는 것은 이젠 인류의 관계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적인 관계가 중요하다 해서 그걸 강조하느라 하는 말이에요.(16: 59-60).

우선 두 가지를 먼저 지적해 두어야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언급한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는 말은 누가복음 17장 21절 말씀을 함석헌 선생님이 자유롭게 사용한 표현입니다. 정확한 본문은 Η βασιλεἰα τοῡθεοῡἐντὁςὑμῶν έστιν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또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함 선생님은 복음서의 중심 개념이기도 한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줄곧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씁니다. 왜 그런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용어는 누구복음 보다는 오히려 마태복음에서 자주 쓰인 표현 ἡβασιλεἰα τῶν ούρανῶν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두 번째, 함 선생님은 “너희 안에/ 너희 가운데” 두 가지 번역 가능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용 본문에서 보듯이 여기서 ‘안에’ 또는 ‘가운데’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은 함 선생님이 얘기한 메소스(μεσος)가 아니라 엔토스(ἐντὀς)입니다. 그러므로 인용문 속에 들어있는 말은 엔토스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 구절의 번역은 계속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번역은 대체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 구절을 Das Reich Gottes ist inwendig in euch (하나님의 나라는 내면적으로 너희 속에 있다)고 번역한 것이 이른바 ‘심령천국’을 얘기하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불가타(Vulgata) 라틴어 번역도 이와 비슷하게 Regnum Dei intra vos est(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역들은 예컨대 영어번역의 경우에는 "in you admist", "within you", "among you" 등 여러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문제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을 수용하면서도 결국 ‘너희 안에’ 라는 것이 우선적이며 실제 의미라고 함 선생님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늘나라는 결국 내면성의 문제이고 내면성은 정신, 영 또는 혼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정신의 나라”, “영의 나라”로 이해합니다(16: 63) 사회적 관계도 정신없이, 정신을 통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너희 가운데’는 ‘너희 안에’에 기초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함 선생님은 내면화의 혁명은 정신적인 면에서의 혁명이지 사회혁명이나 정치혁명과는 무관한 것이라 주장합니다(16: 62).

“인류의 소망이 있다면 정신면으로 발달해야 한다”(16: 66), “이 몸뚱아리로는 소망이 없다고 하는 강조해야 돼”(16: 66), “‘하늘나라가 우리들 속에 있다, 정신에 있다’하는 것을 아는 우리 생각 속에 우리 정신 속에 미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줘야 돼”(16: 67), “일체라는 것은 오직 이 정신 속에서 오는 거예요”(16: 67)라는 지적들은 모두 이것을 배경으로 두고 한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이라는 것도 개인 구원에만 머물지 않고 전체 구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함 선생님은 강조합니다(16: 60, 63, 69 참조).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보도록 하지요. 정신 속에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을 함 선생님이 종종 언급하는 ‘하나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종교는 하나님과 내가 하나됨이라 할 수 있다”(16: 203)고 말할 때의 하나됨 입니다. 하나됨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심지어 ‘우리’라는 테두리 안으로 하나됨을 한정시킬 수 없습니다(16: 99 참조). 하나됨은 다른 말로는 ‘전체’를 이루는 일입니다. 여기서 좀 더 복잡한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전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함 선생님은 맥락에 따라서 전체를 여러 가지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과 전체를 동일시하는 경우입니다. 1978년에 쓴 「예수의 비폭력 운동」이란 글에서 “예수는 ... 이제 위신을 잃은 이성을 해방시켜 온전히 하나님께, 다른 말로 해서, 전체에 봉사하는 것이 멸망을 면하고 살아나는 길임을 가르쳐주기 위해, 특히 지배자들, 잘 사는 것들에게 그것을 깨우쳐주기 위해 오셨던 이다”라고 말할 경우입니다(16: 20). 다른 경우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일컬어 전체라고 한 부분도 있습니다.

현실계의 어디에 하나님이 계시냐? ‘전체’다. 부족에서 계급으로, 계급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세계로, 그 수에서는 달라졌지만 언제나 그 전체가 나만도 아닌 너만도 아닌, 또 누구만도 아닌, 대다수만도 아닌, 전체인 성격에는 변함이 없다. 거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예언자, 성자란 사람들은 다 자신의 사람인 동시에 전체에 살려는 사람들이었다. 그 의미에서 그들은 선했고 옳았다.(16: 19) 여기서 전체는 자연을 포함한 우주적 전체라는 뜻보다는 나와 너, 대다수를 뛰어 넘어 하나를 이루는 인간 사회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전체 개념은 마치 칸트의 범주 가운데 ‘전체성’과 마찬가지로 형식적 개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전체개념이 비형식화 탈형식화 곧 형식의 옷을 벗고 , , 구체화되는 것은 형제 개념이 들어올 때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은 너와 나의 구별 없이, 모두 형제라는 사실임을 말한다고 함 선생님은 말합니다(16: 19). 모두가 이렇게 한 형제인 까닭은 본래 한 영으로 창조되었고 생명은 유기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에 상처를 내면 전체가 상처가 나는 것이라고 봅니다(16:20).

인류가 모두 한 형제로, “나만 옳다, 나만 살자”하지 않고 함께 한 형제로 사는 것, 이게 곧 함석헌이 말하는, 탈형식화된 개념으로서의 ‘전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됨, 이러한 전체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 때 비로소 십자가와 속죄에 대한 함석헌 고유의 해석을 만나게 됩니다. 함석헌 『저작집』16권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에서는 딱 한군데서,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강연 글 「믿음의 내면화」에서 함석헌 선생님은 이 문제를 다룹니다. 함 선생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하나됨(atonement)을 - 이 단어가 이 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만 전통적인 속죄 개념을 함 선생님이 줄곧 하나됨으로 이해하는 데는 영어의 이 단어를 떼어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전통적인 ‘대신 속죄’(대속) 교리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동일성이 선행된 뒤, 일종의 정화 과정으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로부터 알고 배워 알고 있었던 대속 사상에 대해 번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함 선생님은 말합니다.

그렇다. 속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 해서 죽으셨다 하는 그 신앙이 확실히 성립되려면, 그러기 전에 예수님의 인격과 내가 딴 사람이 아니다”하는 자격에 가야 할거다. 이 현실 세계에 있어서는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지 하는 건 물론이야. 사람들이 “그래, 그럼 너 따위가 예수란 말이야”하고 대들면 그것 무슨 말로도 대답할 수가 없지. 그러니 그걸 몰라서 "예수와 내가 서로 딴 인격이 아니다” 하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여기 이 부산 앞 바다의 물과 하와이(‘태평양 중심의 오염되지 않은 곳’이라는 뜻으로 쓴 말-편집자) 물이 같은 말이란 뜻에서 하는 말이예요.(16: 70)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예수와 내가 한 인격이라는 말입니다. 함 선생님도 의식하듯이 당장 반문이 따라 오는 주장입니다. 어떻게 내가 예수와 동일한 한 인격이란 말인가?  현실적으로는, 곧 역사 안에서 몸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구조 안에서는, 예수와 내가 한 인격일 수 없지만, 현실 세계보다는 훨씬 크게 무수하게 많을 수 있는 보다 큰 정신세계에서는, 한 인격이라고 함 선생님은 주장합니다. 예수는 곧 “영원히 참다운 인격”이고 예수와 내가 한 인격이라는 말은 곧 내가 “영원히 참다운 인격”이라는 말입니다(16: 89).

여기서 함 선생님은 역사적 예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예수의 본질은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란 영원무한한 정신적 인격”이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곧 영원 무한한 정신적 인격으로, 전체의 생명, 온생명을 발휘하는 것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16: 89). 이와 같은 인간형을 일컬어 함 선생님은 진리인, 도인, 생명인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완전히 무시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역사적 예수가 함 선생님의 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그리스도’가 영원한 인격, 영원한 생명으로 중시됩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것은 우리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과 같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진리인, 도인, 생명인이라는 것은 여기서 온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역사적인 것, 시간에 매인 것,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이 지워지고 오직 정신, 영, 인격, 생명을 중시하는 함 선생님의 정신주의 또는 순령주의에 직면합니다.(강영안, 내일 계속)

강영안 선생님은
강영안 교수님은 경남 삼천포에서 자라나셨다. 네덜란드(和蘭) 자유대학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교수로 재직 중이시다 [주체는 죽었는가? 타인의 얼굴, 자연과 자유 사이, 철학은 무엇인가? 강영안 철학이야기] 등 주옥한 같은 철학 저서를 출판하여 한국 철학계의 거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윤실(기도교윤리실천워원회)의 총무와 대표를 역임하였다. 특히 기독교 서적으로는 사도신경강해에 해당하는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과 [강영안교수의 십계명 강의]를 출판하였는데 매우 권위 있고 박학다식한 기독교 지식과 논리가 용해되어 있습니다. 현재 학술연구재단의 역사철학단장으로 임명되어 대덕 한국연구원 역사철학 과장으로 파견 근무 중에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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