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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함석헌의 기독교 비판과 순령주의 6

by anarchopists 2020. 1. 1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4/29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기독교 비판과 순령주의

3. 함석헌의 순령주의와 행동주의

이제 마무리를 지어 보겠습니다.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철저히 정신적인 것으로, 내면화의 문제로 함 선생님이 보고 있다는 것은 세 단계의 논의를 통해서 충분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남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물음입니다. 일종의 구체적 행동 지침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함 선생님은 혁명을 그 답으로 제안합니다. ‘혁명’은 상당히 초기부터 함선생님이 쓴 단어입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함 선생님이 말하는 혁명은 정치 혁명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정신적인 의미로 혁명입니다. 오늘 저의 논의의 바탕을 두고 있는 저작집 제 16권의 순서로는 네 번째(87-100면) 글로 실려 있으나, 집필 연대로는 마지막 글인 「믿음의 내면화」에 3년 앞 선, 그러니까 1979년에 쓴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글을 보면 함석헌 선생의 혁명 사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함 선생님은 정치적 혁명의 불완전성, 잔혹성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진정한 혁명,참 혁명은 종교적인 혁명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가 참 혁명가였던 것도 정치적인 혁신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인격의 혁신, 혼의 혁명, ‘거듭남’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도 이 때문입니다. ‘회개’, ‘죄사함’, 성령 강림 등을 모두 혼의 혁명, 정신의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풀이됩니다. 여러 곳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흥미롭게 보는 것은 예수가 위대한 혼의 혁명가요, 정신의 혁명가였음은 두 눈, 겹눈을 가졌기 때문이라 함 선생님의 언급입니다.

두 눈을 가졌다는 것은 현실을 한 눈으로만 보지 않고 두 눈으로, 두 겹의 눈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현실을 두 눈으로, 두 겹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모든 것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을 두고 말합니다. 삶도 두 겹이고 죽음도 두 겹이고, 나도 두 겹이고, 나라도 두 겹이라는 말입니다. 삶을 이렇게 두 겹으로 보는 것은

첫째, 부정을 통해서, 파괴와 해체를 통해서 새로운 긍정과 세움을 가져 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함 선생님은 “죽음 속에서 살아나는, 반역을 하면서 사랑하는, 무너뜨리면서 세우는, 생명의 자기 발전의 지혜”라고 말합니다(16: 92). 낡을 것을 뚫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이 뛰쳐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낡은 것 속에 벌써 산 것이 다 자란 것을 보는 사람, 땅위에서 벌써 하늘나라가 내려와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이 그런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16: 92).

둘째, 이것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반대의 수용을 통한 반대의 극복의 의미로도 이해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원수인 뱀에게서 부활의 진리, 혁명의 진리를 배웠다는 말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함 선생님을 따르면 정말 원수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을 원수로부터 배웠고 “자기 혁명을 하는 생명의 진리”를 배웠습니다(16:93)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두 눈, 겹눈으로 보는 이라야 혁명을 할 수 있다고 함 선생님은 말합니다. 그럼 누가 혁명을 할 수 있는가, 혁명의 주체인가 누구인가 물으면 그 답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씨알’들입니다(16: 97). 그런데 이 씨알들을 혁명의 주체로 만드는 방법은 ‘새 종교’밖에 없다고 함 선생님은 누누이 말합니다. 새 종교가 나와야 씨알들을 ‘새 시대의 군대로 행진하게’ 할 수 있습니다(16: 98).

기독교 비판은 결국 새 종교에 대한 염원으로 나타납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순서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새 종교의 출현을 염원하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라는 1956년 1월 사상계에 실린 글에 앞 서 함석헌 선생님은 새 종교에 대해 이미 중앙신학교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새 종교는 무엇입니까? 함 선생님은 스스로 묻습니다.

새 종교가 무어야 '새' 가 곧 새 종교다 ?  새롬, 샘, 삶, 영원히 스스로 새로운 생명을 믿음이 곧 새 종교다. 그러면 새어 나가는 새 날의 샘을 따라 새 나라가 내다뵐 것이다. 뵐 것, 샘이 내 속에, 우리 속에 있다. 속의 것이 나오면 새 것이다. 새 것을 믿으면 새 샘이요, 뜻 곧 명령이다. 새로운 뜻이 참 자유로운 새요, 참뜻은 곧 행동이다(16: 98).

저의 독해 능력으로는 한 마디, 한 구절을 사태에 적합하게 바르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라는 말일 것입니다. 밖으로부터, 타자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나에게 부과된 앎이나 힘이 아니라 내 스스로 알아야 하고 내 스스로 해야 함을 아는 종교여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내 스스로 알고 내 스스로 함은 다른 원천이 아니라 나와 둘일 수없는, 나와 하나요, 나의 원천인 생명에 근원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이것도 잠시, 순간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역의 말로 하자면 영원토록 자강불식(自彊不息)하는 생명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 속에서, 생명의 내부로부터 샘물처럼 솟아나는 참과 지혜와 힘으로부터 이루어진 삶과 행동이 참 행동이고 참 윤리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만일 기존의 종교가 아니라면 이렇게 ‘새로움’을 줄 수 있는 종교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내 안에, 우리 안에 있으므로,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겠지요. 이 때 우리는 정신이요, 혼이요, 영이므로, 또 다시 우리는 함 선생님의 정신주의, 순령주의를 만납니다. 육신을 입으신 말씀, 삶의 구체적 모습을 경험하신 예수, 곧 역사상의 예수, 우리 신앙의 지극히 일상적인 의미, 요컨대 일상적 거룩(secular sanctity)에 대한 관심과는 무관한, 지극히 정신화되고, 보편화되고, 전체화된 신앙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강영안, 끝)

강영안 선생님은
강영안 교수님은 경남 삼천포에서 자라나셨다. 네덜란드(和蘭) 자유대학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교수로 재직 중이시다 [주체는 죽었는가? 타인의 얼굴, 자연과 자유 사이, 철학은 무엇인가? 강영안 철학이야기] 등 주옥한 같은 철학 저서를 출판하여 한국 철학계의 거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윤실(기도교윤리실천워원회)의 총무와 대표를 역임하였다. 특히 기독교 서적으로는 사도신경강해에 해당하는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과 [강영안교수의 십계명 강의]를 출판하였는데 매우 권위 있고 박학다식한 기독교 지식과 논리가 용해되어 있습니다. 현재 학술연구재단의 역사철학단장으로 임명되어 대덕 한국연구원 역사철학 과장으로 파견 근무 중에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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