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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

[함석헌학회] 생명-환경 통전성 존재론 6

by anarchopists 2020. 1. 1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5/11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생명-환경 통전성 존재론

(라) 통전적 성의 존재론: 전망적 결론
함석헌의 통전적 세계관이 성적 연결망으로 구성된다고 하자. 그 전망은 어떠한가? 정당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이러한 해석을 수용할 때 그 함축은 무엇인가? 함석헌의 체계의 정당성은 그 체계가 확보하는 개념적 구조의 설득력에 의존한다면 함석헌 사상이 이 시대의 개념적 연결망에서 특정한 자리를 어떻게 부여 받는가에 따라 그 설득력은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통전적 성의 존재론은 물리주의의 대안일 수 있다고 믿는다. 물리주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리적으로 환원되거나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리주의는 이러한 형이상학의 기획을 위해 지난 한 세기 동안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통찰을 철학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의식을 포함한 인간의 심성 내용은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도 없고 설명되기 어렵다는 점이 보다 넓게 수용되고 있다.

물리주의의 문제점은 물질과 마음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구조 안에서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물질만 실재이고 마음은 실재가 아니라는 관점이 제시하는 실재성은 물질 기준의 관점에서 구성된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실재성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는가? 마음이 아파 몸져 눕는다면, 마음의 실재성이 부인될 수 있을 것인가? 몸의 진화는 수용하고 마음의 진화는 수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진화 과정에 대한 일방적 읽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통전성 존재론은 세계를 달리 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고 믿는다. 뜻과 생명의 동치성 가설은 인간에게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지만 이 가설은 다른 동물, 식물, 무기물에도 적용될 수 있는 구조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진화가 인간에게서 이렇게 현시되었다면 그 마음의 원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떤 종류의 가능성으로서 배태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통전적 성의 존재론은 현대 사회의 정보론적 세계관과도 일관된다. 정보론적 세계관이 “정보란 사태의 통사적 단위의 형식이다”, “모든 사태는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문본이다”, “인간의 눈이 닿는 어떤 것도 텍스트이다” 와 같은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함석헌의 뜻과 생명의 동치성 가설은 그러한 관점과 어울릴 수 있는 관점이 되는 것이다. 과거의 어떤 존재론이 이 정도로 정보론적 세계관과 맞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통전적 성의 존재론은 고난 개념을 강조한다. 함석헌은 어떻게 고난에 주목하는가? 다른 존재론이나 인간론은 무엇을 핵심으로 하는가? 고난 개념은 사랑, 평등, 자유, 정의, 같은 개념들과 어떤 종류의 대조, 비교, 평가가 가능할 것인가? 물론 고난 개념이 인간론의 모든 국면을 조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난 개념은 인간론의 연대 구조를 선명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고 믿는다.(정대현, 끝)

정대현선생님은
정대현 선생님은 고려대에서 <지식개념의 일상언어적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심성내용의 신체성》, 《필연성의 문맥적 이해》, 《지식인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이후,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과 템플 대학교에서 수학하시고 이화여대에서 인식론, 언어 철학, 심리 철학을 강의하셨다. 이화여대에 재직하시면서는 이화여대 창립 120주년 기념식에서 이화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2006) 선생님의 저서 중, 《한국어와 철학적 분석》(1985)은 문화공보부 추천도서에, 《심성내용의 신체성》(2001)은 한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함석헌학회> 자문위원으로 계신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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