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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by anarchopists 2020. 1. 1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6/10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에 의하면 “성실한 종교사상가는 줄타기 곡예사와도 같다. 사실상 그는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서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의지처는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위에서 걷는 것이 진짜로 가능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인에 대한 평가가 비단 종교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나 종교적 신비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는 영성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종교인이라면 응당 그러한 초월적인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봅니다.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줄 위에서 평형을 잡아 주는 부채나 장대로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며 바람처럼 무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종교인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지처 없이 그 위에서 걸음.” 바로 그리스도인이 복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종교의 본래성을 짚으라 하면 초월성과 신에 대한 전폭적인 의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함석헌은 예수의 복음 즉 기쁜소식이 거래되고 있다고 비판을 합니다. 헐값으로, 몰정신적 태도로, 맹목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두려움으로, 하나님 나라의 보장보험 등으로 복음은 값싼 은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복음은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복음은 신이 베푼 무상이요,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에 대해 함석헌 “복음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저 받은 것이다... 거저 받은 것은 비천하여서가 아니요 값으로써 헤아릴 수 없이 고귀함으로써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단지 복음이라는 것이 은총이라 해서 인간은 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라는 무책임한 존재나 구원의 무임승차를 용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은 매우 엄격합니다. “기독교는 이행도(易行道)라 오상하지 말라.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이 밟을 수 있는 길 중 최난 최험의 행로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수양도 아니요 개량도 아니다. 한 생활에서 전연 다른 생활로 변함이다. 거듭남이다. 그런고로 인생 전체를 들어 제단 위에 놓아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지불할 필요가 없는 대신에 전부를 드려야 한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서 걷고 있는 것처럼.” 오로지 자신을 줄에다만 맡겨야 하는 삶, 줄 외에는 어떤 길도 없는 곡예사와 같은 삶, 자신의 몸은 공중에 떠서 하늘의 제대 위에 높이 올린 삶. 그것은 땅이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이 아니라도 삶이 혹은 삶의 자유로움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초월적인 삶으로 인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절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나를 넘어서고 세계를 넘어서는 삶은 나를 신에게 바치는 난행도(難行道)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실존은 절망하는 존재다. 절망이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 바로 그것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래성에 충실하지 못할 때 실존은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해야만 하는 것은 종교인의 실존입니다. 절망이 있어야 자신의 본래성에 대해 인식을 할 수 있습니다. 절망이 있어야 “als ob”(마치 ~처럼)에 대한 삶의 성찰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als ob”(마치 ~처럼)의 신앙 즉 종교의 자기 자신은 무상의 복음이요,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 살지 못한다면 절망의 역설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살려고(買) 하지 말고 복음을 살려고(삶) 하고 살아내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함석헌
은 참다운 종교를 위해 애증이 섞인 비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 풍부한 교양을 얻으려는 자는 가라. 사회에 유익한 사업을 하려는 자도 가라. 무슨 이익을 얻으려는 자는 첫째로 가라. 예수는 오직 자기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자기에 의하여 새로 살기를 원하는 자만을 허락한다. 크리스찬은 (문자대로) 생명을 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als ob”(마치 ~처럼)입니다. 마치 예수처럼, 마치 생명을 버리는 자처럼, 마치 십자가에 못박힌 것처럼 살아야 적어도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전부를 드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칸트(I. Kant)의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을 자신의 논리대로 살짝 바꿔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즉 악이 존재하지 않기를 네가 동시에 바랄 수 있도록 해주는 원칙에 따라 오로지 행동하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종교에서 악이란 신앙의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산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악과 싸워야 할 종교가 악의 실체를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값싼 은총으로 퇴락되고 급기야 그것을 사고파는 사물화(物化, Verdinglichung)의 악으로 현존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고약한 신앙 이념이 되지 않도록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다시 나고 또다시 나서 계속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김대식, 2010. 6. 9)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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