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

예수는 비약(飛躍)입니다.-1

by anarchopists 2020. 1. 1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6/09 06:02]에 발행한 글입니다.


“예수는 비약(飛躍)입니다”

오늘날 종교 속에 ‘놀라움[비약]’이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게 됩니다. 삶을 뛰어 오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약하는 종교, 혹은 초월적 삶을 살려고 하는 종교를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한 단계 올라서게 하는 종교의 모습, 그것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함석헌은 “예수를 비약”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라는 인물은 새 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새 시대에 걸맞은 종교를 탄생시킨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종교는 예수처럼 비약하려 하지 않습니다. 날아 보려고 애를 쓰는, 올라 보려고 애를 쓰는(erstreben) 몸부림이 약해 보입니다. 알바트로스처럼 긴 호흡을 가지고 비상하는 정신이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선민의식 즉 함석헌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뺀 백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한때의 영광을 누렸지만 이제는 ‘뺀 백성’은 ‘빼어난 백성’은 고사하고 그 자리를 빼앗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의 거짓된 영혼을 쏙 빼놓을 정도의 매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뺀 백성[選民]이라는 거는 하나님이 기도하고 명상하는 가운데, 내 민족의 일을 생각하고 일하는 가운데 그 참된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온 빛”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기도하는 백성, 관상하는 백성, 이 민족을 생각하는 백성으로서 그 빛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그 빛을 소유한다는 것, 그 빛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사명입니다. 그 빛이 드러나야 삶의 세계의 정의가 싹트고 민주주의가 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은 우리나라가 “사회적 정의감”이 약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 된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적 정의감의 발원지가 종교가 되어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하고 현실적, 감성적 감각의 실리를 좇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실리적 화두는 무엇입니까? 행복입니다. 그 행복이 철학적, 반성적 행복이 아니라 감상적 행복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보다 냉철하게 말합니다. 행복은 율법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함석헌은 시편 1편을 해석하면서 그 구절들이 함축하고 있는 새로운 뜻풀이를 시도합니다. 율법이란 단순히 지식이나 교훈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방법, 생활력, 생활목적의 근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 비약도 없고, 초월도 없으며 정신적 도약도 없다는 것은 결국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인간 사회의 규범도 표준도 없는 불안과 동요의 상태가 존재한다고 단정짓습니다. 신의 율법에 맞갖게 살아야 할 인간이 그러지 못해서 불행하고 불안하며 오만방자한 죄인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서가 갖고 있는 보편적 진리가 드러납니다. 사실 신은 인류가 율법을 잘 준수해서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신의 거룩한 뜻[聖意]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신과 자신의 관계성을 성찰하고 죄를 미워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아주 간단한 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을 즐거워하고 사모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삶을 비약하게 만드는 힘이 될 것입니다.

율법의 근간을 단 한마디로 설파하신 분이 예수입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죠
. 이에 대해 함석헌은 “사랑이 으뜸”이라고 말합니다. “삶은 내기다. 내고 내라는 나다. 삶은 오름이다. 오르고 오름이 옳음이다. 삶은 으뜸이다. 으뜸부터 으뜸에서 나왔고, 으뜸으로 살고 으뜸에 이를 것이다. 삶은 사랑이다. 사랑내기다. 사랑이 으뜸이요, 으뜸은 사랑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을 오르게 하기 위해서 사랑을 으뜸으로 여기고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존재를 지각한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고 나의 관점이 없이[편견 없이]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의 대상인 타자를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존재를 받아들임(Vernehmen)이며 자신을 제공하고 내주는 것입니다. 타자 즉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가지지 않고(Nicht-haben) 그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는 씨알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을 잃어버린 존재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없는 품으로 타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비약, 삶의 오름 그래서 정말 삶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으뜸인 사랑을 가지고 타자를 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예수는 비약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종교가 신의 율법을 지키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인간의 전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규범, 표준인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종교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비본래적, 본능적, 감상적 행복을 지양하고, 보편적 가치로서의 삶의 오름을 위해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삶의 바탈만이 인간의 본래적인 현존성(Anwesend)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2010.6. 8,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