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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함석헌의 탈바끔(개혁-혁명-진화)사상 4

by anarchopists 2020. 1. 1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5/1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탈바꿈(개혁-혁명-진화) 사상

3. 전체론적 비전 - 「펜들 힐의 명상」(2)
이와 같이 함석헌이 이름 붙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체계의 기초가 되는 전체론이 세계철학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있는가 살펴보자. 영어사전에는 어의만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철학사에서는 아예 없거나 희귀하다. 개인주의가 견고하게 뿌리박은 사회에서 전체론은 주목을 받을 수 없었을 법하다. 근래에 와서 생태학적 방안이 모색되는 과정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자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됨직은 하다.


주요한 철학사 기술에서는 빠지는 전체론(holism)을 언급한 유일한 사상가는 스머츠(J.C. Smuts)(1870-1950)라는 남아공화국 정치가 겸 철학자이다. 그의 저술 가운데 『전체론과 진화』(Holism and Evolution)(1926)가 있다. 그의 견해를 ‘전체론 철학’이라 이름하고 그는 우주 속에서 작동하는 두 가지 요인 또는 경향을 구분한다. 진화의 가장 아래 단계에서는 ‘기계적 요인’이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가장 위 단계에서는 ‘전체론적 요인’이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함석헌이 설정한 전체론적 의식이 지배하는 진화단계와 부합한다. (우리는 이 단계에 진입해야 한다.) 기계적 단계에서는 전체를 구성하는 덩어리들이 특질을 상실하지 않고 더 나누어질 수 있지만 전체론적 요인은 질적 상실이 없이 더 나누어질 수 없는 “전체들”(wholes)을 창조한다. 스머츠는 또한 진화가 일련의 창조적 비약을 통해서 물리적 수준에서 생물학적 수준으로 그리고 영(정신)적 수준으로 진행한다고 본다. 창조적 비약은 함석헌도 언급하거나 암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함석헌이 알았을 리가 없는 사상과 우연한 일치를 본다. 그만큼 그의 사유가 예언적이면서 보편적 타당성을 갖는다.

전체론적인 사고는 최근에 새 시대(new age) 철학자/종교학자/심리학자/사회학자의 한 사람인 켄 윌버에 와서 크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스머츠 처럼) ‘전체’(whole, holon)를 설정하면서 ‘통합적 영성’(integral spirituality)을 강조하고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있다.

함석헌의 전체론은 성서 해석학과 신학에서 획기적인 해석으로 평가될 가치가 있다. 아마 이것은 선/악 이분법에 젖은 신학자나 철학자는 다다를 수 없는 시각이다. 함석헌이 2천년의 과제를 전체론적, 연기론적 사고로 일거에 풀어버린 셈이다. 그것은 불교사상의 백미로 평가되는 화엄철학에서 말하는 법계연기(法界緣起)론과 같은 것이다. 본체와 현상, 절대존재(신)와 상대적 존재(인간) 그리고 현상적 존재 상호간에는 불가분리의 유기적 관계가 본유하다는 원리이다. 얽히고설킨 중중(重重)무진(無盡)한 상호관계는 상호동일성(相卽)과 상호침투성(相入)으로 설명된다.

연기의 원리는 석가모니가 6년 고행 후에 진리를 얻지 못하고 새로운 결의를 다지며 보리수 밑에서 자기 식으로 명상에 진입하여 드디어 얻어낸 대각(大覺)의 주 내용에 해당한다. 철학적으로 ‘인과(因果)론’이다. 사람의 노화와 죽음(老死)의 근본원인은 무명(無明)(무지함, 깨닫지 못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슬을 깨트리는 것은 지혜(반야지)의 획득 즉 깨달음을 통해서이다.

연기론은
현대에 와서 틱낫한 스님을 통해서 사이(상호)-존재(間存 inter-being)라는 참신한 개념으로 해설된다.) 모든 현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구름과 종이 한 장 사이에도 나눌 수 없는 유기적 관계가 성립한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오지 않고 비가 오지 않으면 나무가 자라지 않으며 그렇게 되면 종이를 만들 수 없다. 그 중간에는 나무꾼과 제지공장이 필요하다.)

함석헌이 전문적인 화엄교리를 알고 있었다는 증좌는 없다. 그가 ‘인생대학’(감옥)에서 읽었다는 불경 목록에 화엄경은 들어있지 않다. 더구나 중국 화엄종에서 체계화한 법계연기론을 접했을 리가 없다. 다만 화엄에서도 중시하는 일(一)과 다(多)의 양면성을 그가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화엄 불교와만 연관된 것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함석헌이 연기론을 인과론을 통해서 잘 체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는 인도식으로 표현하면 아바타르 곧 화신(化身)입니다. 인과법칙에 얽매임 없이 불가사의의 능력에 의해 이 인과의 세계 속에 나온 것입니다.” 예수를 연기법을 벗어난 해탈자처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연기법을 함석헌은 예수와 가롯 유다의 관계를 해석하면서 깨우친 셈이다. 이는 그의 대각에 해당한다. 이 사실은 기독교 토착화 역사의 한 전범이 될 것이다. 여기에 살을 붙이면 역시 그가 크게 기여한 민중신학 못지않게 세계 신학계에 큰 기여가 될 만하다. 이로서 세계종교의 동서축을 대표하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 연결고리를 제공한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함석헌의 ‘나’의 해석이다. 일반적인 맥락은 제쳐두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맥락에서 ‘나’는 예수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자아를 가리킨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면 알고도 모른 말입니다. 옳고도 잘못입니다. 예수가 아닙니다. ‘나’입니다.”(4:202, 398) (2;207) 예수가 아니고 “내가 길이요 내가 참이요 내가 생명이란 말이다.”(12:289)

“내(自我)가 곧 (하늘)나라요, ‘나(自我)를 본 자가 아버지(민족,세계,하늘)를 본 것이다.’” “그 나는 ‘아브라함 있기 전부터 있는 나’, 참 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인 나다.” 여기서 그는 불교의 격언까지 새로 해석한다. ‘나’는 석가모니자신이 아니다. 주체적 자아이다. 여기에 상대적 존재와 초월적 존재 사이의 유기론적 연기적 관계가 등식으로 기술된다.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인은 물론 불교인들에게도 새로운 화두가 될 것이다. 비슷한 해석은 한국불교에서 근현대에 와서 선례가 있었지만 불교 밖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인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일 것이다. 서양에서는 지금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와 보완적인 관계설정이 활발히 논의되고 실천되고 있다. 한국의 현실은 이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종교도 진화해야 한다! 그것은 함석헌의 입장만은 아니다. (김영호, 내일 계속)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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