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사상

함석헌의 탈바꿈(개혁-혁명-진화)사상 2

by anarchopists 2020. 1. 1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5/1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탈바꿈(개혁-혁명-진화) 사상

2. 함석헌의 깨달음 - 무엇을 깨달았는가

함석헌은 개인의 일생의 탈바꿈을 여섯 단계로 나누었다. 어림, 젊음, 일함, 찾음, 깨달음, 날아올라감이 그것이다
.(5:89) 다섯 단계 ‘깨달음’에서 그는 “생각하면 깨닫게 된다. 깨닫고 보면 인생관이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인생의 참모습을 깨닫고 나면 속이 텅 비고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된다. “비면 속이 뚫려서 진리를 알게 된다.” 진리는 “상대적인 모든 차별에서 초월한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해탈에 가까운 비약이다.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이 여섯 단계는 공자의 자아성장 6단계, 즉 (15세에) 배움에 뜻을 세우기(立志于學), (30세에) 목표를 세우기(立), (40세에) 미혹되지 않기(不惑), (50세에) 하늘의 뜻 알기(知天命), (60세에) 열린 마음(耳順), (70세에) 어떤 행동에도 법도를 넘지 않음(不踰矩)을 상기시킨다. 다만 함석헌의 구도에 있는 깨달음에 해당하는 단계와 초월 또는 비상(飛翔) 단계가 공자의 성장구도에도 존재하느냐는 의문스럽다. 함석헌은 공자보다 더 종교적이고 영적 상승을 강조하는 인도전통에 가깝다.

‘깨달음’ 단계에서 함석헌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 내용은 그의 사상의 큰 줄기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줄기는 1) 역사철학적 측면에서, 민중사관에서 씨알사상에 이르는 줄기, 2)종교철학적 측면에서, 무교회주의에서 퀘이커 평화주의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한 새 종교의 열망에 이른 줄기, 3) 사회철학적 측면에서, 비폭력과 민주화 및 통일의 실천론 그리고 국가주의의 극복에 이르는 줄기 , 4) 존재론적 측면에서, 전체론적 사유와 ‘같이 살기 운동’의 실천론에 이르는 사유의 줄기 등으로 대강 분류해 볼 수 있다.

이것을 편년사적으로 순서를 엄격하게 매기기는 힘들고 큰 줄기들은 혼융되어 있다. 예를 들면 첫째 줄기에서 민중사관은 비교적 초기에 형성되었지만 그 완결로서의 ‘씨알사상’은 후기에 속한다. 씨알사상에는 다른 줄기들, 즉 민중, 비폭력 평화, 전체론 등이 다 합류되고 내포되어 있는 통합 개념이다. 각각의 사상의 갈래는 ‘조선역사’, 우찌무라, 간디와 톨스토이, 요한복음 등 계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계기가 없었더라도, 자기 내면에서 결국 움트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특히 가장 중요한 사상이라 할 만한 씨알사상과 전체론적 사고는 역사와 사회의 투시와 내면적 관찰을 통한 자각에 의해서 얻은 결실이었다.

이 사상체계의 갈래들은 자신의 의식전환, 탈바꿈을 표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만의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니고 인류역사의 진화단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그의 사유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만의 소승적인 구원이 목표가 아니었다.


‘생각’은 함석헌의 인식론의 핵심이다. 생각은 단순한 사고나 의식작용만이 아니라 심층적 사유와 깨달음의 수준에까지 확대된다. 생각을 깊이 파면 깨침과 깨달음에 이른다. “생각이 깊어야 합니다.”(8:39) “생각하면 깨닫게 된다. 깨닫고 보면 인생관이 달라진다.”(5:93) 함석헌은 이승만 시대에 그를 감옥에 가게 만든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 첫머리부터 ‘깨달음’을 말한다. 물론 6.25라는 ‘역사적 사건의 뜻’이 그 내용이지만 예사로운 사고나 이해가 아니다. “역사적 사건이 깨달음으로 되는 순간 그것은 지혜가 되고 힘이 되는 법이다.” 그것은 “불덩이를 삼킴이요 올가미를 벗김”이다.(14:109) 해탈의 지혜처럼 들린다.

씨알이 할 일 두 가지는 ‘겉으로는 제 몸을 지키는 것’과 ‘속으로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8:57). ‘생각’은 철학적 사유만이 아니라 종교적 깨달음을 함의한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적 깨달음과 역사의 이해가 있어야 사람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살고 남을 살릴 수 있는 바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본능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것이 인간 살림의 시작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자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생각의 본질이다.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삽니다. 생각 못하면 쭉정이입니다. 씨알의 씨은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하늘은 한 얼입니다. 하늘에서 와서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얼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얼이요 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 생각이 각 둘이 있습니다.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 생각을 하는 것은 나는 생각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둘이 본래 하나입니다.”(8:56-7)

여기서 ‘나는 생각’은 계시의 차원이다. 계시는 자각을 목표로 하는 종교에서는 자각 즉 깨달음에 해당한다. ‘얼’은 사람이 본유한 불성(佛性)이나 계시종교의 신성(神性)과 같은 것이다. 함석헌의 ‘생각’은 생각(生覺) 즉 깨달음(覺)을 내는 것(生)이다. 그 속에서 자각과 계시가 합류한다. 불교와 기독교가 회통하는 모습이다.

인식론적으로 깨달음은 지식을 통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정말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직감입니다. 직감은 생명의 주인인 ‘그’를 믿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8:36) 이기적 나(자기)에 대한 생각은 “자꾸 좁혀 넣어야” ‘그이’의 계시를 받을 수 있다. 그의 사유는 논리적 사고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영감과 계시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새벽의 기도 시간에 모른 척 할 수 없는 어떤 말씀을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감추어둘 수 없고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기에 아무 준비 없는 이대로를 씨알전체 앞에 내놓아 전체의 지혜와 능력을 기다릴 뿐이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정부에서 새마을운동을 발표했다.” (14:25-6)

여기에 계시라면 계시고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라할 과정이 들어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대각을 연상시킨다. 깨달음은 한 개인에게서 출발한 것이지만 씨알전체의 검증을 받아 완성되고 곧장 사회적 실천으로 확대된다. 여기서 나온 사유내용이 바로 ‘같이 살기’ 운동이다. 관주도의 ‘새마을운동’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두 가지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하나는 이름 없는 씨알이 하는 것인데 하나는 대통령이 시키는 일이다. 이것은 아래서 위로 피어오르는 생명의 운동인데 저것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 씌우는 권력의 운동이다.”(14:26) 이처럼 함석헌이 도달한 깨달음의 내용은 대승적이요 사회적인 차원에 속한다.(김영호, 내일계속)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