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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어록과 단상

함석헌의 타고르의 시 해설-바닷가에서

by anarchopists 2019. 12. 6.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0/1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 타고르의 시와 함석헌의 해설



바닷가에서
타고르(양주동 옮김)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가없는 하늘 그림같이 고요한데
물결은 쉴 새 없이 남실거립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소리치며 뜀뛰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모래성 쌓는 아이
조개껍질 줍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웃으면서 한 바다로 보내는 아이
모두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헤엄칠 줄도 고기잡이 할 줄도
진주를 캐는 이는 진주 캐러 물에 들고
상인들은 돛 벌려 가고 오는데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으고 또 던집니다

그들은 남모르는 보물도 바라잖고
그물던져 고기잡이 할 줄도 모릅니다
바다는 깔깔거리고 소스라쳐 바서지고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사람과 배 송두리째 삼키는 파도도
아가 달래는 엄마처럼
예쁜 노래를 들려줍니다
바다는 아이들과 재미나게 놉니다
기슭은 흰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길 없는 하늘에 바람이 일고
흔적없는 물위에 배는 엎어져
죽음이 배위에 있고 아이들은 놉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는 아이들의 큰 놀이텁니다

함석헌의 해설

인도의 시인이며 사상가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에 나오는 이 아름다운 시를 읊으면서, 역시 시인이며 사상가인 함석헌은 씨알(민중)과 역사의 의미를 반추한다.

[씨알은 영원의 아이들]

“영원의 바닷가에 아이들은 모였다 헤어지더라”고 타고르는 노래불렀지요. 역사란 마치 아이들이 바닷가에 모래로 탑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쌓았다간 무너뜨리고는 또 쌓습니다. 무너뜨리기 위해 쌓고 쌓기 위해 무너뜨립니다. 저희 발로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바다도 또 더 잘 무너뜨립니다. 바다도 아이들 같은 것입니다. 바다와 아이들은 잘 놉니다. 아이들더러 힘껏 재주껏 지어봐라 하는 듯이 모래를 잔뜩 가져다주고는 저 멀리로 나가고, 기껏 다 지어놓으면 단번에 쑥 밀려들어와서는 자취도 없이 무너뜨리고는 허허 웃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신이 나서 그 영원한 음악에 맞추어 합창을 합니다.

아이들과 바다가 하는 그 싸움인지 놀음인지, 저기 남는 것은 떠서 도는 거품밖에 뵈는 것이 없지만 그 동안에 아이들은 자랍니다. 생각하는 마음이 됩니다.

바다는 무심한 것이요, 아이들도 순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그것을 합니다. 그들에게는 일과 노는 것이 따로가 아닙니다. 성공도 실패도 없습니다. 그저 자람이 있을 뿐입니다.

밤이 되면 바다는 아무 투덜댐 없이 그것을 다 깨끗이 씻어버리고 새날이 되면 역시 변함 없는 가슴으로 그들을 꼭같이 안고 놉니다. 사실은 바다가 웃어주는 건지 꾸짖어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역사란 희극이람 희극이요 비극이람 비극입니다. 아닙니다. 비극 따로 희극 따로가 있지 않습니다. 희극은 아픔이 너무 지극해서 웃는 웃음 아닙니까? 마치 동대문시장의 웃음소리같이. 비극은 사랑이 너무 지독해서 하는 눈물 아닙니까? 마치 헤어지는 부부의 싸움같이.

철없는 영웅 아이들이 하는 꼴이 하도 가엾어서 옛날의 어진 이들은 그 모래탑이 진짜가 아니고 곧 거품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려 애를 많이 썼고 자기네들은 언덕 위에 초연히 누워 있어 가라앉은 마음으로 그것을 구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조차도 모래탑과 한가지로 사라져버렸습니다. 바다는 그 마음조차도 하나로 안고 싶었습니다. 바다 내놓고 또 딴 마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들은 자랐습니다. 큰 참 안에서 참도 거짓이요 거짓도 참이며, 얻음도 잃음이요 잃음도 얻음이지만, 마음은 영원한 아이입니다. 영원히 자라는 자람입니다.

1973년은 하나의 모래탑 세움입니다. 영원의 바다 위를 부는 거센 바람이 우리 가슴을 부릅니다. 모래탑을 쌓는 벌거숭이들마냥 가슴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짓는다 아니 짓는다의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가 삐죽해 울고 있으면 전체가 죽습니다. 쌓는 모래탑에 뜻이 있는 것 아닙니다. 모두 다가 하나 되어 바다의 웃음에 한가지로 웃는 것이 일입니다. 네 거 내 거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긴 놈 진 놈이 있겠습니까? 영도자란 다 무엇입니까?

제 것이라고 심술을 부리거든 내주고 다른 탑을 또 쌓읍시다. 무한의 바닷가에 모래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건방지게 싸우는 것들이 있거든 내버려두고 노래를 부릅시다. 영원의 바닷가에서는 싸움도 춤의 한 귀절이 될 수 있고 울음도 음악의 한 소절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한없이 큰 것입니다. 힘껏 쌓아놓으면 그 꼭대기에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가는 인도의 깃발밖에 꽂을 것이 없고, 아쉽게도 무너질 때는 그 속에서 새 꿈이 불사조처럼 날개를 치고 나옵니다. 건넛집 심술쟁이들을 큰마음으로 데리고 바닷가로 나갑시다.

거센 바람이 붑니다. 그 바람이 우리 코로 들어오면 생명이요 그 생명이 우리 속에 살면 빛입니다. 빛을 가지고 어둠 속을 비추면 어둠이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씨알은 영원의 아이들입니다. (1973, 「새로 지음」) (저작집8:90-)

[철없는 군인들이 12년 전에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자기 소유물처럼 독재의 피묻은 썩은 칼을 맘대로 휘두르는 시절에 권력과 명리의 모래성 같은 헛됨을 알려주는 교훈을 주고자 쓴 인문학(문.사.철학)적 해설이다.] (2011. 10.15김영호 발췌 및 설명)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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