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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학, 종교자리의 위기

by anarchopists 2020. 1. 1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7/0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영역(領域, 자리)의 철학과 종교학: 삶의 영역(자리)의 위기


1. 함석헌과 종교의 영역(자리) 위기 사회학

아주 오래 전에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은 종교의 사회적 변동 혹은 사회학적 변화에 주목하면서 “종교, 특히 전통적인 형태의 종교는 사회적인 중요성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대다수의 현대인은 종교적인 계시에 직접 접촉하여 감동하는 순간도 없으며, 계시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Brian Wilson, 윤원철 옮김, 현대의 종교변용, 전망사, 1984, 15)고 말한 바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거의 그의 저서 말미에서는 비관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는 항상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과연 재생할 수 있을는지 그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147). 비록 오래 전에 전망된 종교사회학적 진단이기는 하지만 그 진단 자체가 허투루 한 소리가 아니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거의 같은 시기에 출판된 함석헌의 옛 판본에서도 오늘날 종교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그 형식은 그 민족을 따라 그 시대를 따라 가지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짬되는 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 곁들여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 것이 세계주의(世界主義)와 과학주의(科學主義)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가주의(國家主義)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요, 독단적인 태도를 내버리고 어디까지 이성(理性)을 존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할 때는 과학 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 주고 신앙은 그 과학 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내게는 이제 믿는 자만이 뽑혀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 혹은 극락세계에 가서 한편 캄캄한 지옥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보다 많은 중생을 굽어보면서 즐거워하는 그런 따위 종교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나는 적어도 예수나 석가의 종교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1983, 18쪽)

함석헌은 종교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취합니다. 아니 종교적 사유나 행위에 대해서 어떤 특정한 종교의 절대적 우위성에 대해서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그에 대한 함석헌의 주장을 몇 가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교는 하나입니다.
-종교는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종교는 참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는 독단적인 태도를 지양해야 합니다.
-종교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존중하되 더 높은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종교는 전투적이지 말아야 하며 타종교의 신앙과 전통을 존중해야 합니다.

요컨대 종교는 자신의 자리를 잘 찾아야 한다는 말로 들립니다. 모든 종교는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아니 종교는 사회 속에서 어떤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인간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며 위안을 주기도 하지만 사회를 향해 날카롭게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자리는 어디 멀리 떨어져서 자신만의 게토화된 일정한 영역을 고수하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석구석을 잘 살펴보면서 각 종교가 가진 고유의 신념대로 인간들을 ‘참’으로 계도합니다. 그런데 각 종교가 자리를 잡다 보면 자신만의 종교가 가장 우월하며 유일한 구원 공동체라고 자부하면서 급기야 서로 경쟁과 반목, 그리고 쟁투를 하기도 하지요. 일종의 자리 다툼, 영역 다툼입니다. 동물들도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동물들 특유의 방식으로 영역표시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물이 되지 말자고 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함석헌이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참’을 추구하도록 매진하는 일입니다. ‘참’은 ‘truth’이기도 하지만, ‘차앎’입니다. 찬 상태, 참을 지향하는 것, 꽉 찬 것, 정신의 알짬이 꽉 찬 것,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냥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충만 즉 차야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종교가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참’을 추구하는가 추구하지 않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형식’(form)입니다. ‘질료’(material)를 담기 위해서 필요한 그릇입니다. 그러기에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형식 안에 어떤 ‘내용’이 있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교의 형식 즉 그리스도교니 불교니 힌두교니 이슬람교니 하면서 서로 틀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형식이 틀린 것(wrong)이 아니라 다른 것(difference)입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욱이 이러한 종교의 형식조차도 보편적, 선천적(a priori)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시대적, 역사적 의식이 반영된 개별적, 후천적(a posteriori)인 것인데도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합니다. 절대성과 정체성이 지나치게 되면 결국 배타성을 띠게 됩니다. 배타주의는 자신만의 종교 이외에 어느 종교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매우 독단적(臆見的, doxa/opinion)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형식 또한 자크 데리다(J. Derrida)의 언어를 차용한다면, 디페랑스(differance) 즉 차연(差延)이어야 합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뒤로 유보하면서 종교의 완성을 위해서 나아가는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제 종교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 질료를 가지고 따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 자비, 인(仁), 도(道) 등이 오히려 종교가 가진 인류의 보편적 진리 혹은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가 서야 할 자리가 자꾸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리(topos)의 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것이 타종교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이 서로 그 우위성을 확보하려는 절대 종교에 대한 미욱한 자리 다툼도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과학기술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지나치게 과학을 맹신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학을 너무 악으로만 몰아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과학이 발달함으로써 가지고 온 인간 삶의 편리성과 이기(利器)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함석헌은 과학적 이성보다 종교 혹은 종교적 이성을 우위에다 두어 종교가 가치중립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과학의 이론과 행위에 대해 예측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하며 더불어 종교는 그 이상의 이른바 형이상학적 태도나 사유, 초월적 삶을 견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함석헌의 단문(短文) 안에서도 우리가 되새기고 곱새겨야 할 말들이 많다는 것을 볼 때 오늘날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함석헌의 종교 인식과 종교의 미래에 대한 위기적 진단 자체는 높게 사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비판을 통해 오늘날 종교가 종교 고유의 자리 즉 종교의 제자리를 잘 찾아야 할 것입니다(2010/07/05).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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