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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대식 4] 함석헌의 그 사람과 인간성의 자리

by anarchopists 2020. 1. 1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7/08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영역(領域, 자리)의 철학과 종교학: 삶의 영역(자리)의 위기

1. 함석헌과 종교의 영역(자리) 위기 사회학
(2010. 7.5일자)


2. ‘뜻’ 자리 찾는 종교
(2010. 7.6일자)

3. 함석헌의 얼굴 현상학과 인간(다움)의 자리(영역)
(2010, 7,7일자)

4. 함석헌의 ‘그 사람’과 인간성의 자리

중세의 신비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정신에 따르고, 정신을 향해, 정신의 충고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Meister Eckhart, Josef Quint 편역, 이부현 옮김, 신적 위로의 책, 누멘, 2009, 107)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정신이 고갈되고 있으면서도 그 정신이 좀먹고 있는 우리의 현상 세계를 그냥 바라보고 따라가기만 하는 우리의 모습 속에 과연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보장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인간의 삶이 지속되면서 갖는 어떠한 생명력 일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함석헌의 해석학적 용어로 풀이하자면,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삶숨’ 같은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삶숨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인간성(humanity)의 위기, 인간성의 자리의 위기라는 점입니다. 정신을 갖고 살아야 할 사람에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정신이 인간을 살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 정신을 갖고 살도록 만드는 추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겉살림이 아닌 속살림을 위한 정신(얼)을 바로 보도록 만드는 근원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요? 필자는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함석헌의 글 두 편을 음미해보려고 합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전집, 수평선 너머, 한길사, 1983, 191-192)

“공자님도 너희가 홀로를 삼가라 그러셨고, 예수 말씀도 너희가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지금 사람은, 현대의 지금 우리는 홀로란 별로 없지 않은가, 거의 없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 홀로란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내가 나를 상대로 하고 있는 때를 가리키는 말인데, 자기를 문제로 삼아서 진지하게 파고 들어가려는 태도는 아주 부족하지 않는가? 겉의 살림이 아주 편리하게 됐기 때문에 자극을 주는 것도 많아서, 그 바깥에만 정신이 팔리지 나를 문제로 삼는 일은-종교야말로 나를 문제로 삼는 건데-그런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396)

함석헌에게 있어서 사람을 갖는다는 의미는 겉-살림, 겉-봄, 겉-치레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적 기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상이든, 인물이든, 철학이든, 종교이든 간에 그 안에 삶을 삶답게 만드는 그 얼, 그 사람을 갖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우리로 하여금 모험을 넘어서 죽임, 쟁투, 억압, 반목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겉-살림이 아니 속-살림을 통해서 오롯이 서 있는 주체적인 맘을 갖도록 하는 얼, 잣대, 좌표, 속생각을 심어주는 사람을 갖고 있느냐 하는 물음을 진지하게 성찰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 Bloch)는 “인간이란 존재는 항상 초심자이며 세상은 언제나 모험장이다. 그리고 인간의 역할은 거기에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다”(E. Bloch, 서울․문학과 사회연구소, 철학입문[원제는 미래의 철학], 청하, 1984, 11)라고 말했듯이, 인간의 자리란 온갖 위험과 위기, 그리고 불안에 빛을 비추고, 계몽을 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흑암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한 그런 사람, 그런 인물, 그런 사상가를 갖고 있어야 인간 자신의 속살림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람이 없습니다.’ 벌건 대낮에 등잔불을 켜들고 “어디 사람이 없어요?”라고 외치며 다닐 만큼 인간성의 자리를 회복하고, 인간의 속살림을 위한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질, 지위, 명예, 권력 등 겉-살림에 푹 빠져 버린 우리는 속으로 파고 또 파고드는 사람을 오히려 새치름히 눈을 깔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리, 참된 인간성의 자리가 어디인지 이제는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자리는 모호해져서 다시 자리에 대한 메타담론이 이루어져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사람들은 또 새삼 인간의 자리에 대한 담론이 고개를 내민다고 비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리는 영역 다툼이 일어나는 자리가 아니라 마땅히 본질이 있어야 하는 인간성의 자리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래성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인간의 본래적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함석헌이 말한 것처럼, 더도 말고 단 한 명이라도 ‘그 사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겉-살림에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고, 바깥 치레에만 몰두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지속적으로 채찍질을 해줄 수 있는 ‘그 사람’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서 바깥에 정신이 팔려 있던 우리들이 ‘그 사람’으로 인해서 다시 ‘저 맘이야. 그리고 저 맘이 곧 내 맘이 되어야 돼’하고 반성하면서 내면으로 들어설 수 있기 위해서는 ‘홀로-있음’이 요구됩니다. 아무리 인간이 사회적 동물[정치적 동물, zoon politikon/animal sociale]이라고 하더라도, 그 관계성에서 빚어지는 겉-살림의 경도된 행위를 지양하도록 만드는 것은 ‘홀로-있음’입니다.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공자와 예수도 이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속살림이 매우 중요하게 요구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인간은, 홀로 있으면서 자신의 언행을 삼가는 ‘신독’(愼獨)을 통하여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 정신(얼)을 다시 안으로 향하도록 하는 삶의 자세가 인간(성)의 자리를 깨우쳐 줄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 사람’의 얼을 갖고 ‘속사람’, ‘속살림’의 길을 떠나봄이 어떨까요. 새로운 인간의 자리를 열어 밝혀줄 ‘그 사람’을 갖고 말입니다(2010/07/08,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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