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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대식2] 종교의 위기- '뜻'자리를 찾자

by anarchopists 2020. 1. 1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7/06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영역(領域, 자리)의 철학과 종교학: 삶의 영역(자리)의 위기

1. 함석헌과 종교의 영역(자리) 위기 사회학
      (2010.7.5 실림)


2. ‘뜻’ 자리 찾는 종교

“유신론자, 무신론자가 다같이 믿으며 살고 있는 종교는 무엇일까? 그래서 한 소리가 ‘뜻’이다. 하나님은 못 믿겠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는 없지 않느냐? 긍정해도 뜻은 살아 있고 부정해도 뜻은 살아 있다. 져서도 뜻만 있으면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할 것이다. 이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뜻이라면 뜻이고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고 생명이라 해도 좋고 역사라 해도 좋고 그저 하나라 해도 좋다
.”(함석헌전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1983, 19)

위에서 말하고 있는 함석헌의 종교에 대한 정리(定理)는 종교의 본래적인 ‘뜻’자리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갖는 공통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뜻’입니다. 그는 뜻을 ‘하나님’, ‘생명’[함석헌의 풀이로는 삶숨], ‘역사’, ‘하나’ 등이라고 하면서 ‘뜻’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며 근원적 개념들을 살피려고 합니다.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종교는 ‘뜻’이 있습니다. 종교가 ‘뜻’이 없이 존속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뜻’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종교의 가르침에 귀의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종교는 자신의 ‘뜻’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뜻’자리를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뜻’이 빠진 종교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뜻’이 있어야 다같이 믿으려고 하고 그 ‘뜻’에 부합하며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뜻’이 뜨뜻미지근하거나 ‘뜻’을 반뜻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종교의 생명력은 보장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뜻’자리를 상실하지 말아야 하며, 혹 그것을 잃어버렸다면 그 ‘뜻’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뜻’이 있어야 뜻있게 살 수 있습니다. ‘뜻’이 있어야 그 ‘뜻대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교의 창시자의 뜻대로 사는 것이 종교의 고유의 목표이며 그것을 위해 종교를 선전하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종교가 그 ‘뜻’마저도 마음에서 놓아버리고 ‘뜻’자리에서 떠나 있다면 ‘뜻’을 말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오늘날 종교의 위기 중에 하나는 바로 그 ‘뜻’과 ‘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뜻’ 자리에서 떠나 버린 종교의 위기(crisis)는 호기(good opportunity)가 아니라 위험(risk)입니다. 위험사회학을 주장하고 있는 앤서니 기든스(A. Giddens), 울리히 벡(U. Beck), 니클라우스 루만(N. Luhmann)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사회는 위험의 수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의 공포와 불안이 우리를 압도하는 현실 속에서 ‘뜻’만이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뜻’ 자리를 잊어버린 종교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니 더욱 공포와 불안이 우리를 엄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의 ‘뜻’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하니 말입니다.

종교학자 길희성은 지금 사람들은 우주적 영성을 통한 자연의 재성화(resacralization)를 추구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의 종교는 사회적 기능보다는 정신적, 영적 기능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을 말한 바 있습니다(길희성, “왜 불교인가”, 길희성 외, 종교간대화, 현암사, 2009, 11-26). 각 종교가 우주적 영성으로까지 가기 위한 발걸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 발걸음의 초기 단계는 역시 ‘뜻’에 있기 때문에 그 ‘뜻’을 발견하지 않고서야 우주적 영성을 논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니 종교의 정신적 기능이라 하면 ‘뜻’이 살아 있는 종교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종교가 사회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그 자리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자리’ 때문이 아니라 그 종교가 갖고 있는 ‘뜻’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가 자신의 자리를 위해서 종교적 권위나 종교적 카리스마를 빙자해서 타인에 대한 유무언의 폭력과 행위의 폭력을 행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자리를 먼저 찾아야 할 일입니다. ‘뜻’이 없다면 ‘자리’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원규(종교사회학자)는 최근 개신교의 성장 그래프가 하향곡선을 긋고 있는 것에 반하여 타종교(특히 가톨릭)는 급성장을 하는 원인을 종교외적요인인 사회적 평판이나 신뢰라고 지적을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그 종교가 갖고 있는 본질을 끊임없이 소급, 환원하려고 했던 몸부림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 본래의 ‘뜻’ 자리를 찾아보려고 애를 쓴 흔적 때문입니다.

오늘날 종교가 종교 고유의 ‘뜻’을 되새기며 그 ‘뜻’을 내적 에너지로 삼고 외적으로 표출해보려고 하는 움직임이 힘에 부쳐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제 ‘뜻’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뜻’으로 돌아가 그 ‘뜻’을 되새기는 종교가 될 때,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과 같은 학자들의 종교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뜻’은 종교의 의미이자 삶과 역사의 의미요 사람들의 의미로서 세계의 공통된 정신의 밑바탕입니다. 사람들은 종교에게서 그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인간의 삶을 일으켜줄 ‘뜻’, 믿어야 할 ‘뜻’을 말입니다. 어디 ‘큰 뜻’을 펼치는 종교는 정말 없는 걸까요?(2010/07/06,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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