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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대식 3] 함석헌의 얼굴현상학과 인간다움 자리

by anarchopists 2020. 1. 1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7/0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영역(領域, 자리)의 철학과 종교학: 삶의 영역(자리)의 위기




1. 함석헌과 종교의 영역(자리) 위기 사회학
(2010. 7.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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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뜻’ 자리 찾는 종교
(2010. 7.6일자)


3. 함석헌의 얼굴 현상학과 인간(다움)의 자리(영역)

인간의 얼굴은 살아온 흔적들이 묻어 있습니다. 물론 유전인자가 그 사람의 얼굴 모습을 이루는 주된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얼굴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다움의 모습, 혹은 인간의 ‘자리’를 나타내는 존재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연관된 함석헌의 시 한 편을 읊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얼굴

참 고운 얼굴이 없어?/ 하나도 없단 말이냐?/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 이 세상 뭘 하러 왔던고?/ 얼굴 하나 보러 왔지?/ 참 얼굴 하나 보고 가잠이 우리 삶이지/ [......] 그 얼굴 그리워, 아아/ 그 님의 그 얼굴 늘 바라고 늘 그리며/ 눈물로 사라지는 슬픔에 씻긴 맑은 눈으로/ 눈물에 사라지는 세상 얼굴들 바라보고/ 늘 기쁨에 늘 찬송에 늘 사랑에 살고 싶으네/ 늘 그리움에, 늘 영광에, 살고 싶으네/ 이 바닷가 걷고 싶으네
(함석헌전집, 수평선 너머, 한길사, 1983, 87-92).
이러한 함석헌의 시 속에서 인간의 얼굴은 상호주관성, 상호주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얼굴은 주체의 모습입니다. 서로 타자의 얼굴 속에서 존재의 새로움과 존재의식을 발견한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함석헌은 인간의 얼굴 중에서 ‘참 고운’ 얼굴을 찾습니다. 인간의 수많은 얼굴은 자신의 존재성, 시간성, 진정성 등을 드러냅니다. 그 관계성 속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것이 얼굴입니다. 그 얼굴에서 대면하는 이성과 감정의 교차점에는 바로 ‘참’과 ‘고움’이라는 미학적 표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학이라고 해서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아름다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니는 자리,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내면의 무의식의 그림자와 의식을 조화시키면서 살아가는 존재이지, 야수성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참[眞]이나 아름다움[美]보다는 야수성에 굴복하며 순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지닌 동물적 본성에 묘한 마력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영역, 인간의 자리에 대한 위기가 표출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지나친 경계와 구획을 나눈다는 것 또한 문제이겠지만, 반면에 인간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감추어진 야수성을 드러낸다는 것 또한 사회적인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함석헌이 현상학적 시감정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 특성을 ‘얼굴’로 보고 있다는 데에는 해석학적 의미가 깊다 할 것입니다. 얼굴, 참되고 고운 얼굴, 나의 시름을 잊게 만들어 주는 얼굴을 평생 한 번만이라도 보고 가자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사한 맥락에서 프랑스의 현상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 Levinas)는 ‘얼굴 현상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차라리 얼굴로 나아가는 것 그게 곧 윤리라고 본다. [......] 얼굴의 정직함이 있다. 숨김없이 얼굴을 드러
낸다. [......] 얼굴은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다. 마치 폭력을 저지르도록 우리를 끌어들이는 듯하다. 동시에 얼굴은 우리의 살인을 금지한다. [......] 얼굴은 뜻이다. 상황 없는 뜻이다. [......] 얼굴은 오직 자신에 대한 의미다. 너는 너다. 그러므로 얼굴은 ‘보이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얼굴과의 관계는 윤리다. 얼굴이란 누구도 죽일 수 없는 것이다. 또는 적어도 얼굴의 뜻은 ‘당신은 죽일 수 없소’라고 말하는 데 있다
”(E. Levinas, 양명수 옮김, 윤리와 무한, 다산글방, 2000, 109-111). 이러한 레비나스의 얼굴에 대한 해석은 내가 타자에게 응답하고 책임적인 존재로서 심지어 ‘살인하지 말라’라는 성서의 계명을 실행해야 하는 존재로서 살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111-114). 즉 한마디로 “얼굴은 윤리”입니다.

함석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참 얼굴입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행위하도록 만드는 어떤 근원적인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 참 얼굴을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밝아지고 기쁨이 생기는 얼굴. 뿐만 아니라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약자이면서 상처투성이인 타자에게 책임적으로 응답하고 살아가는 그 얼굴을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자리, 인간다움의 자리라고 하면 억지일까요? 오히려 지금 우리 사회는 타자의 얼굴에 대해서 외면하고 타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 하면서도 약자이자 낯선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함석헌의 인간의 얼굴 타령은 레비나스의 얼굴 현상학과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얼굴, 그것은 인간의 정신이 밖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과 행위를 참과 아름다움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나라는 존재도 또 다른 얼굴로서 나의 자리가 중요한 만큼 그의 삶의 자리, 생명의 자리, 일자리, 노인의 자리, 어린이의 자리, 장애우의 자리, 가난한 자의 자리 등도 중요하다는 감정이입을 통해 타자의 자리를 배려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매우 중요한 자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매개체입니다. 몸 전체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장소 곧 자리입니다. 존재의 진리와 존재의 초월을 드러내는 존재자의 자리. 그러므로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얼굴이 형이상학적 얼굴이든, 실재론적 얼굴 혹은 현상학적 얼굴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얼굴을 지금 여기에서 우리 모두가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서로 그 얼굴이 돼보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요? 그 얼굴이 그립습니다. (2010/07/07,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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