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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종교

[김영호 제6강] 함석헌과 불교사상-무아와 나 버림

by anarchopists 2020. 1.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4/18 08: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불교사상
무아(無我)와 ‘나’ 버림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당시 힌두교 전통에서 벗어난 혁명적인 사상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표징이 무아(無我)론이다.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서 그 존재를 주장하는 절대 원리 브라흐만(Brahman)이나 자아(Atman)는 근거나 실체가 없는 개념으로 부정되었다. 그 근거 하나로 ‘나’라고 말하는 것은 분해해보면 다섯 가지 요소(五蘊:色受想行識)로 구성되어 있는 집적체일 뿐이며 오온 역시 무실체한 신체적(色 즉 형태) 및 심리적 요소들(感受, 상상, 意志, 의식 작용)이다. 집착의 대상인 ‘나’의 무실체성 즉 무아를 깨달을 때 무집착, 무소유의 경지, 해탈에 이를 수 있다.

함석헌이 무아론 자체를 념두에 두고 불교식으로 분석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원리에 맞게 사고하고 무아정신에 충실한 삶을 실천하며 산 불자에 못지않은 모습을 보여 준 셈이다. ‘무아’의 원리를 다른 사상을 통해서 휘돌아 도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전풀이에서 열자(列子)를 해설하면서 말한다.

“급오무신(及吾無身)이라, 내 몸 없음에 미치다. 몸은 있지만,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천지간의 원소를 삼사십 개쯤 모아놓은 것이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빌려서 있는 것이다. 몇 십년동안 여기 있다가 가려고 빌렸다. 이것이 무너져 나간다 해도 나는 있을 테다. 이 모두가 내 거 아니다. 본래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내 원대로 꼭 된 것도 아니다. 자연 속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인연으로 해서 내가 빌린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이 나라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빌려서 있게 됐지. 참 나라는 하늘나라뿐이다.” (전집11:38)

여기서 원소와 숫자가 다르고 ‘하늘나라’가 끼어들지만 근본 뜻은 불교의 무라론과 상통한다. 물론 함석헌은 기독교를 통해서도 ‘자기 버림’ 즉 무아에 이르고 있다.

“[예수가 보인] 참과 은혜는 자기를 절대로 무(無)로 인정하고 절대로 순종하는 그 태도다. 한 마디로 하면 자아를 완전히 부정하고 하나님을 절대 주장함이다.”(19:294) “믿는다는 것은 그 예수를 나로 삼는 일이다.”(295)

예수가 제자들에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것은 “가르침을 듣고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219) 나를 예수와 동일시하는 점에서 다르지만 대체로 불교 무아론의 기독교적 해석이다. 함석헌은 명상록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내가 나를 바로 알면 나를 버린 것이다. 나는 죽어버렸다. 내가 나를 바로 사랑하면 나는 죽어버려졌다. 나는 죽었다. 그럼 내가 그리스도다.”(4:398)

‘씨알을 대표하는’ 성인은 이름도 없고(聖人無名), ‘제 마음이란 것이 없는 것’(聖人無己心)입니다. “제 마음도 없는데 제 이름이 있겠습니까? 있지도 않은 이름을 명함까지 써가지고 다니며 선전하겠습니까?”(8:256) 명예욕에 들뜬 세속 풍정을 두고 한 말이다. 불교 경전에서도 ‘나’란 것을 가명(假名)이라 한다.

이렇듯 하나님이나 예수에게 자기를 맡기는 자기부정의 길은 무아론의 취지와 다르지 않다. 신앙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 다른 점이지만 어법이나 도구로 보면 된다. 맹자의 양성(養性), “깨닫는 것”, “불교의 견성(見性)”은 “근본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것”과 일반이다.(18:17) 무아 개념은 대승불교에서 ‘공’(空) 개념으로 다시 표현되었다. 함석헌은 도덕경을 주석하면서 불교경전(반야심경)을 인용하여 풀이한다.

“공은 형이상학적 세계고, 색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계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공과 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이 곧 색이다. 절대계와 상대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곧 절대요 절대가 곧 상대라. 상대를 나타내지 않는 절대없고 절대 아닌 상대도 없다.”(20:108)

공이 허무주의적 개념이 아님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기독교로 돌아가서 함석헌은 예수의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을 들어서 ‘공’을 말한다.

“산상수훈을 옛날에 번역하는데 첫 말을 “마음이 빈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했어요. 그 번역이 잘됐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이다’ 하는 것은 무슨 소리냐. “내 마음을 지금 비우렵니다” “내 마음을 비게 하고 싶습니다” 그 말 아닐까. 우리가 기도를 하지만 기도는 결국 내 마음을 비는 것인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거는 하나님밖엔 다른 아무것도 없단 말인데, 그러면 진공상태에 들어가는 거예요. 말은 쉬운데 마음이 진공되기가 참 어렵지 않아요? 만일 마음을 참 비운다면, 아무것도 없는 빈 마음에 간다면 하나님이 거기 계실거고. 마음이 빈 자는 복이 있나니, 비니까 하늘나라는 그 사람의 것일 거예요. 빈 자리가 곧 하늘나라일 거니까.(15:67)

불교 공관(空觀) 사상에서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모습이다. 나아가서 함석헌은 ‘공’을 버리는(空空) 지경에까지 언급한다. “내버린다는 것은 나의 주장을 내버려야 되는 것이다. 버린다 하는 생각조차 버린 지경, 순수한 부정, 아무것도 없는 지경이다.”(4:393) 그래서 그는 무교회주의까지 버린 것일까. 또 다른 집착대상이 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버려야 할 나는 허망한 자신(ego 小我)이지 진정한 나, 참 나(眞我)가 아니다. 주체적 자아는 부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나를 잃어서는 아니 되지요. 나는 나의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 여러분의 나요, 민족의 나요, 인류의 나요, 하나님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탱해야 될 ‘나’는 사적, 개적인 ‘나’가 아니고 공적, 집합적 개체로서의 ‘나’이다. 함석헌은 어느 누구보다 철저히 사적 개인으로서보다는 공인으로 살았다. 공인정신의 화신으로 대공무사(大公無私)한 삶의 전범이었다. 무소유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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