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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함석헌의 이상과 오늘의 현실 1

by anarchopists 2019. 12.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3/28 06:14]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이상과 오늘의 현실 (1)

유난히 긴 겨울이었습니다. 지금쯤 봄 기운이 남쪽에서부터 올라와야할 시점이 아닌가 싶은데 엊그제는 눈까지 휘날리며 냉기가 돌아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기후는 우리 사회와 세상의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일본의 대지진은 자연재해에다 인재까지 겹친 큰 사건이었습니다. 지구온난화를 촉진하면서 인간의 끝 모르는 탐욕이 자연재해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경각하게 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2012년을 가리키는 더 큰 재앙을 막으려면 이제라도 탁해진 마음, 탐심(貪心)을 돌이켜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인간의 탁한 기운이 천지의 기운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천안함 사건이 난지 1년이 지났다니 믿기지 않을 만큼 개인이나 나라에게 세월은 빠르게 갑니다. 여기저기 추모 현수막이 관청과 관변단체 주변에 걸려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건의 진실을 놓고 공방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추모를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의아심이 듭니다. 확실한 원인과 책임이 밝혀져야 추모의 눈물이 의미를 갖게 되고 희생이 나라 발전에 공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이라도 정권의 비호에 이용되었다면 영혼들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사실과 진실 속에서 남북관계가 바로 선다면 병사들의 희생이 더 값진 것이 되겠지요. 남북이 꽉 막혀있는 것은 몸속의 정맥이나 동맥이 경화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안 그래도 위아래가 따로 노는 기형의 신체가 반신불수까지 된 꼴입니다.

낼 모래 곧 닥쳐오는 4.5.6월은 우리에게 잔인한 2분기(分期)입니다. 어느 영국시인이 읊은 ‘잔인한 달’은 우리에게 4월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보릿고개를 넘어온 셈이라고는 하지만 50년, 60년 전 4.19, 5.16, 6.25 의 기억은 악몽과 같습니다. 아직도 악몽을 꿀 정도로 우리 세대에게 인생은 슬픈 고행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애국가를 불러야하는 정체성혼란을 겪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만이 아니고 그 후유증과 여파가 아직도 깊게 남아있습니다. 이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도 4.19 혁명의 실패, 5.16 이후 한 세대 이상의 군사독재, 나라의 뿌리를 앗아간 6.25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이 분단되고 동서가 정치적 심리적으로 사실상 나뉜 상태에서 옛날 삼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형국입니다.
지역분화, 갈등에다 신분, 학벌, 재산의 차이에 따른 계층 분화, 양극화까지 덧보태서 사회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만나고 있지만 끼리끼리만 만나고 어떤 사회관계도 들여다보면 모두가 혼자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각기 야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치판이 따로 없습니다. 이익을 갈라야할 때는 언제라도 갈라설 태세입니다. 자기뿐인 사회입니다. 거창하게 명분은 내세우지만 알고 보면 대개 자기 목적이 깔려있습니다. 공동체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한강의 기적은 정말로 기적입니다. 공동체는 공생이나 상생의 정신을 가져야 지탱이 됩니다.

개인으로서 공동체로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자신에게 다시 물어야 합니다
. 삶의 뜻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자기가 지금 부지런히 하고 있는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떤 것입니까. 그냥 먹고사는 수단일 뿐입니까. 무지랭이 서민들은 몰라도 적어도 교양인이나 지식인은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 아닐까요. 어떤 소명이나 사명을 갖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인생은 투기, 도박 같은 것입니까. 자기는 사람의 틀 거리를 갖춘 인격체입니까. 그 인격체들이 모인 집단인 이 나라가 내세울만한 통일된 틀 거리(國格))가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누구보다 대통령과 사회지도층이 자문하고 대답해야 할 사항입니다. 어른들이나 사회가 지침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시험지옥에 내몰린 청소년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청소년들이 세계에서 사회성(사회교류역량)이 꼴찌라고 합니다. 자살률은 일등이고요. 이 사회를 짊어지고 나가야할 아이들이 그렇다면 이 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삶의 준거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줘야할 교육도 종교도 언론도 제 몫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 다시 생각나는 인물이 함석헌입니다. 그가 특별히 잘나서가 아닙니다. 가장 보통 사람으로서 상식과 양심을 근거해서 말하고 행동한다면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언행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지 못해서 돋보일 뿐입니다. 그는 여러 번 극한 상항에서 굴하지 않고 양심과 지성을 발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범이 된 것입니다. 그가 영웅이라고 말한다면 그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일 것입니다. 이제 개인주의, 영웅주의 시대를 지나 전체가 같이 사는 전체주의(파쇼가 아닌)로 진행해야한다는 것이 함석헌의 소신이었습니다.

미국의 새 사조를 대표하는 철학자/심리학자 켄 윌버가 주장하듯이, 자기-중심(egocentric)에서 민족-중심(ethnocentric)으로 다시 세계-중심(worldcentric)으로 (나아가서 우주-중심kosmocentric 까지) 가는 것이 역사의 방향입니다. 함석헌의 생각과 일치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자기-중심에 머물러 있습니다. 말은 민족이라고들 하지만 민족-중심에도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랬다면 통일이 벌써 되었게요.) 민족주의 시대에는 민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입니다. 세계주의를 지향했지만 현실로서는 그는 민족주의 옷을 아직 입고 살다 갔습니다.

함석헌을 읽기가 어렵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마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함석헌을 읽으려면 먼저 자기 생각과 견해(편견)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가슴을 열고 머리를 비우고 읽어야 하고 남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생각의 기준을 바꿔야 합니다. 이 혼란의 시대에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과 좌표를 파악하기 위한 잣대가 필요합니다. 그 잣대는 누구보다 함석헌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공적인 삶을 산 실천적인 지성이며 사상가를 따로 떠올리기가 힘듭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가 아는 어떤 인물보다 인류가 지향해야할 보편적 가치를 분야를 넘어서 종합적으로 탐구하고 찾아냈습니다.

함석헌적 가치관과 세계관은 또한 우리가 벌려놓은 [함석헌평화포럼]이 바로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도 합니다. 함석헌 이름을 앞세우고 시작한 이 마당을 반드시 그의 말씀을 일일이 되새기면서 나갈 필요는 없다고 보고, 함석헌을 알거나 모르거나 자유롭게 글을 쓰자고 해서 여러 분야 필진이 수고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도 함석헌의 보편적 세계관, 가치관과 정신을 살리는 결과가 된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그가 평생 싸워온 폭력주의나 물질주의, 교조주의, 극단주의로 나가고 있는지 때때로 점검해보는 것이 안전하게 보여집니다.

다음 달(4.30)에 〈함석헌학회〉주최로 “함석헌의 이상과 오늘의 현실”을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립니다. 이 주제의 자료가 될 만한 글들은 현실진단과 자기점검을 위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씀 일부를 이번 주에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2011. 3.25,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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