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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정치인들, 종교다원주의를 아시오

by anarchopists 2020. 1.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1/0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다원주의와 애기봉

“용서할 수 없는 한 가지 죄는 배타성이다. 어떤 형태의 종교도 사실들을 앞에 놓고 시험을 치를 때 그 배타적인 주장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사람이나, 책이나, 제도나 다 그 경쟁자들(라이벌)의 장점과 단점들을 공유하지 않은 것은 결코 없었다. 어떤 종교도 그 가르침이나 사상, 실천 면에서 배타적으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종교들이 드디어 자기들의 신화를 벗어나 성장하고 있는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인도의 진보적 힌두교, 미국의 유대교 지도자들, 우리들의 [자유 종교 협의회]는 본질적으로 같은 원리들을 가르치고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 볼티모어의 유대교 회중은 해방된 노예들 교육을 위하여 맨 먼저 기여한 단체였으며, 샌프란시스코의 불교 사원은 링컨 대통령의 암살 뒤 만장을 건 최초의 건물이었고, 동부의 파시교도들은 위생국에 기부금을 보냈다. 세계의 주요한 종교들은, 작은 종파들과 마찬가지로, 같이 자선 사업을 하고 같은 소망을 공유하면서 각자가 점점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모든 다른 종교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미신과 죄악을 벗어나는 문이 ‘기독교’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민족들은 다른 출구를 찾는다. 그네들은 우리들의 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는 모두가 신이 마련해둔 -인간의 이름을 지니지 않는- 넓은 영토에 도착하게 된다. 지상의 신의 통치를 ‘그리스도의 왕국’이라고도 ‘부처의 왕국’이라고도 불리지 않을 것이다 - ‘신의 교회’ 또는 ‘인간 공화국’이라 불릴 것이다. 나는 한 종교(a religion) 에만 속하고 싶지 않다 - 종교(the religion)에 속하고 싶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신앙을 포괄하는 것이라야 한다.”
(토마스 히긴슨 1871)

이 글은 19세기 미국 사상가 히긴슨(Thomas Higginson 1823-1911)이 쓴 저술 “종교들의 조화(공감)”(The Sympathy of Religions)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히긴슨은 에머슨, 소로우와 동시대의 인물로 뉴잉글랜드의 초절(초월)주의자(transcendentalist) 그룹에 속한다. 19세기에 벌써 종교다원주의의 싹이 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읽어도 현대 종교학에서 만발하고 있는 비교종교학과 다원주의적 종교학의 담론과 별로 다르지 않은 내용이다.

이러한 전통이 보스턴 지역의 학풍으로 이어졌다. 하버드 대학의 모태인 하버드 신학교는 미국에서 가장 자유로운 신학교로 알려져 있다. (자유주의 신학과 진보성을 반대한 보수파가 예일대학을 만들었고, 거기서 또 불만을 가진 보수파가 프린스턴대학을 창설했다.) 거기서는 힌두교나 불교를 주제로 연구할 수도 있다. 학위를 받은 한국 불교승려들도 여럿 있다. 하버드대 학부과정에서는 세계종교, 종교다원주의가 필수과목으로 들어있다. 힌두교 전공학자인 한 교수(Diana Eck)는 다원주의 프로젝트(pluralism project)를 운영하면서 미국을 종교다원주의 사회로 규정한다. 미국이 근본주의 기독교가 강하기도 한 나라이지만 종교의 용광로이기도하다.

이같은 다원주의 시각은 인도의 종교전통에서도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 자취는 현대에 와서 마하트마 간디의 종교관에 뚜렷이 나타난다.

“내가 말하는 종교는 외형적인(formal) 종교나 관습(전통)적인 종교가 아니고 모든 종교들 저변에 잠재되어 있는 종교, 우리의 조물주(Maker)를 직접 대면하게 만드는 그런 종교를 의미한다.”(1909)

간디의 종교는 바로 히긴슨이 가리킨 종교(the religion)에 해당한다. 그것은 힌두교를 초월한다. 그것을 유(類) 개념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개별 종교들(a religion, religions)은 종(種) 개념에 해당한다. 마치 인류는 하나고 인종은 흑인종, 백인종, 황인종 등 여러 색깔로 나누어 말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 불교 등으로 알려진 종교들은 인위적인, 제도화한 조직종교들이다. 그것은 인종과 문화가 다르듯 다양하다. 배타주의자들이 고집하듯이 어떤 한 가지만을 원조, 원형이라고 할 수 없다. 함석헌의 종교도 그렇다. 진리는 하나이듯 종교도 하나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를 자기 종교와 다른 종교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차별할 근거는 없다. 간디는 전형적인 길의 비유를 든다.

“종교들은 같은 지점에 합류하는 다른 도로들이다. 우리가 동일한 목적지에 이르는 한, 우리가 서로 다른 도로로 간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무언가? 실제로 개개인들 수효만큼 많은 종교가 있는 셈이다.”(1909)

사실 아닌가? 우리가 같은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절대로 신앙 내용이 같을 수 없다. 신(하느님)을 도화지에 그려 보라면 다 다르듯이, 구구각각일 터이다. 인도에는 그렇게 많은 신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같은 종교라도 종파, 교파가 얼마나 많은가. (함석헌의 기독교도 문자대로, 어느 교파 교리대로가 아니고 자기 나름으로 취할 것 취하고 버릴 것 버리고 선택적으로 조합한 내용이다. 누구나 절충주의자(eclectic)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분명해진다. 간디는 말한다.

“오래 동안 연구하고 체험한 결과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1) 모든 종교는 참이다. 2) 모든 종교는 부분적으로 착오를 내포하고 있다. 3) 모든 종교는 내 종교인 힌두교만큼 나에게 소중하다. 마치 내가 모든 인간들을 나의 친족만큼 소중하게 느껴야 되듯이. 다른 신앙에 대한 나의 존경은 내 자신의 신앙에 대한 존경과 똑 같다. 그러므로 개종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1928)

간디는, 종교는 하나지만, “기질이 다르고 기후조건이 다른 만큼 그에 적합한 다른 개별종교들이 있게 마련”이라고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종교는 많은 가지가 달린 하나의 나무이다. 가지들 같이 종교들이 많다고 할 수 있지만, 나무 같이, 종교는 다만 하나이다.개종을 하거나 시키는 것은 불필요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가능하지도 않다.

동서를 관통하는 다원주의적 종교관은 오늘 우리 종교인들, 정치인들, 군인들이 귀담아들어야할 교훈이 된다. 연말에 북한 땅을 마주보는 전방 애기봉 전망대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설치하여 북한을 자극한 사건은 국제적인 상식을 벗어난 무지하고 위험한 행동이다. 그것도 7년 전에 선전행위를 않기로 남북이 합의한 협정을 깬 것이다. 종교(기독교)와 정부의 밀착에서 온 소행이다. 정교유착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모든 종교에도 개방해야 하지 않은가. 국민의 안전을 담보로 한 종교의 의례를 고집한 것이다. 마치 두 유일사상이 겨루는 것 같다. 배타적인 두 종교의 싸움이다. 시대착오적인 발상과 행위다. (2011.1.7. 김영호)

김영호 선생님은
인문학의 몇 분야를 방황하면서 가로질러 수학, 연구(스톡홀름대, 하버드대 펠로우), 강사(연세대 숭실대), 교수(인하대, 현재 명예교수)로 일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그의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다원주의다. 다원주의를 통해 민족분단. 사회 및 지역 갈등, 종교간 갈등 등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사상적 준거는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이다. 그 동안,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079)에 관여,『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학회장직을 맡고 있다.(2015년 12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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