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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함석헌의 이상과 오늘의 현실-사회윤리 2

by anarchopists 2019. 12.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4/01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이상과 오늘의 현실 (5)
사회윤리(2) (종교, 생태)
[함석헌의 이상](계속)
"최근에 와서 보는 현상으로는 교회당이 날마다 늘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현상일까. 먼저 교회당은 무엇으로 그처럼 늘어갈까. 여러 말 할 것 없이 돈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당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도 이때껏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보냈다는 것은 못 들었고 인간이 지은 것들이다. 인간이 지었다면 어디서 났거나 돈 있어서 된 것이지 건축가가 지어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해방 후 날로 더 못 돼가는 경제에 교회에는 어떻게 그런 돈이 있을 까. 하나님이 정말 기독교에 특별한 복을 주어 사업이 성했나... 아무리 보아도 교인이 불신자보다 양심이 더 나은 것 같지 않고, 또 설혹 낫다 하더라도 이렇게 전국이 궁핍에 주리는 이때에 기독교만이 양심적인 생활을 넉넉히 하고도 남아서 굉장한 교회당을 오 보 십 보에 경쟁해 세울 수 있게 돈을 퍼부어 준다면 그는 공정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나 교인이 특별히 복을 받아서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아무리 믿는다 하여도 우리 생활은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하고 있으니 내가 의식적으로 했거나 무의식적으로 했거나 내게 생활의 여유가 있다면 남의 노동의 결과를 빼앗아서 된 것이지 결코 정직한 이마의 땀으로 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기독교인이 "나는 정당한 돈으로 산다"한다면 그럴수록 그의 양심의 정도의 낮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양심이 날카롭다면 이 사회 현상에 냉담할 수가 없고, 사회를 자세히 관찰한다면 거기 죄악적인 정도가 합법적이라는 가장(假裝)구조를 가지고 되어감을 모를 수 없고, 만일 그 사실을 본다면 일신이 일 없다고 안연(晏然)하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정당한 보수하에 신부 목사 노릇을 한다 할지 모르나 그 정당은 뉘 정당인가, 하나님의 정당인가. 자본주의의 정당인가. 도대체 직업적 전도사란 것이 자본주의의 산물 아닌가. 그렇게 보면 적어도 이 사회에 사는 한 피묻은 옷 입지 않은 종교가 없고 피로 세워지지 않은 교회당은 없을 것이다. 예수의 피가 아니고 착취를 당하고 죽은 노동자의 피 말이다.

“교회 경영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힘으로 되나. 장로급이 중심이 되어서 돼가는 것 아닌가. 장로란 결코 신앙의 계급이 아니다, 돈의 계급이지. 돈 있는 사람, 교회 경영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을 장로로 하는 것이요, 지금 교의 파쟁이 대부분 그 장로급을 중심으로 하는 일 아닌가. 그럼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인가, 맘몬의 교회인가? 기독교인은 속죄를 받은 결과 이런 것도 죄로 아니 느낄 만큼 강철 심장이 되었는가.

"그렇게 볼 때 교회당 탑이 삼대같이 자꾸만 일어서는 것은 반드시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궁핍에 우는 농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의 가슴속에 양심의 수준을 높여주어야 정말 종교인데 이 교회는 그와는 반대이다. 교회당 탑이 하나 일어설 때 민중의 양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한치 깊어간다. 그러기에 '예수 믿으시오"하면 "예수도 돈 있어야 믿겠습니다" 한다. 이것은 악한 자의 말일까. 하나님의 음성 아닐까. 석조전을 지을수록 거지는 도망하게 생기지 않았나.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하지 않을 까?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그 역사의 마지막 계단이다. 전당을 굉장하게 짓는 것은 종교가 먹을 것을 다 먹고 죽는 누에 모양으로 제 감옥을 쌓음이요, 제 묘혈을 팜이다. 내부에 생명이 있어 솟을 때에 종교는 성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신라 말에 절이 성하여 불교가 망했고, 고려시대에 송도 안에 절이 수백을 셌는데 그후 그 불교도 나라도 망했다. 이조 때 서원을 골짜기마다, 향교를 고을마다 지었는데 유교와 나라가 또 같이 망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애급도 그렇고 바빌론도 로마도 그랬다. 그럼 성전이 늘어 가면 망할 것은 누구인가?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종교지 민중의 종교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도취하자는 종교지 수도, 정진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광야에 나가면 벌판에서, 바닷가에 가면 배 위에서, 밭에 가면 밭고랑에서, 길을 가다가는 우물가에서 예배하는 종교하고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는 무지한 군중을 찾아 가르치다가 저물면 그대로 보낼 수 없어 많거나 적거나간에 같이 나눠 먹고, 밤이면 홀로 산에 올라 별을 바라보며 기도, 예배하는 종교, 그러한 예수의 종교, 성당 없는 종교, 종교 아닌 종교는 지금 이 나라에 있나, 없나." (1956) (함석헌저작집 16권 112-118쪽〈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람이] 하늘, 땅, 햇빛, 구름, 바람, 나무, 버러지, 고기, 짐승과 한 데 어울려 살던 것을 내버리고, 그것을 짓밟고 찢고 죽이고 무서워하고 싫어하고 의심하고 업신여기는 줄로 알고 그것을 자랑하여 왔다. 앞으로는 아니 그럴 것이다. 정치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이 동포가 되어 민(民)으로 살아가는 세계가 된다면 학문, 예술에 있어서는 자연과 인생이 참으로 하나 되는 진리인, 우주인이 될 것이다. 앞으로 윤리는 우주 윤리지, 인간에게만 한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학문, 예술이 윤리화할 것이다. 지금 물질과, 우주관이 대단한 진보를 하고 있다. 이제 지구 위에서 메뚜기처럼 뛰고 개구리처럼 자랑하던 생각을 집어치우고 문명이란 것을 지극히 작은 것으로 아는 한편, 이것을 준비 작업으로 하여 지구를 항구로 삼고, 우주라는 큰 바다에서 큰 배질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우주에 대한 마음씨부터 달라져야 한다. 이때까지 한 것처럼 우주는 죽은 것이라든지, 객관적인 존재라든지, 마음대로 개척하고 정복할 것이라든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든지, 더구나 무슨 적의나 있는 듯이 하는 생각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본래 사람은 우주와 하나였다. 옛적 사람은 온전한 한마음, 통일(統一)관념에 살았었다. 우리의 정신이란 그러한 한마음 속에서 자라온 것이다. 맨 처음 굴 속에 살던 사람들이 뜻밖에도 예술을 남겨 놓은 것을 우리는 본다. 또 모든 과학적, 정신적 발명, 발견이 직관에서 많이 온 것과 종교적 모든 계시. 영감이 인류의 걸어 온 길의 종요한 대목을 비춰서 온 것을 우리가 알지만 그 직관, 계시, 영감은 산 우주의 숨 쉼이다. 산 우주 속에 사는 우주적 심정, 우주적 윤리를 가지지 않고 그런 것을 얻을 수는 없다.

이날까지는 그것이 구름 틈으로 새어 내려오는 외로운 광선같이 극히 적은 수의 사람의 마음에만 있었으나 앞으로는 모든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대학이 정말 유니버시티(university)다. 유니버시티는 유니버살한 것, 총체적인 것, 통합적인 것, 보편적인 것, '한'인 것을 찾고 드러내는 곳이다. 그러면 정말 문명 아닌가?” (1959)(함석헌전집 2권 360-1쪽〈새 윤리〉)

[오늘의 현실]
위 인용문들은 함석헌이 1956-1961년 사이에 쓴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새 윤리와 한국기독교의 사명을 주제로 다룬 내용인데 자본주의와 종교, 특히 기독교 문제를 초점으로 하고 있다. 그만큼 두 가지가 현실적으로 중요함을 가리킨다. 그것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 아직도 타당하고 유효하다. 오히려 문제가 더 교묘하고 복합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단순한 개혁을 넘어 혁명적인 변화를 요청한다. 그것을 실감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우리가 최면당하여 판단력이 마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돈의 노예, (잘못된 조직) 종교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증거다. 누가 우리를 미망에서 깨우칠 것인가. 우리 스스로 인식, 이해, 자각하는 수밖에 없다고 함석헌은 대답한다. 역사를 바로 읽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흔히들 그가 비판(독설)만 하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런 견해는 기득권자, 보수주의자들의 무기일 뿐이다. 잘 드려다 보면 비판 속에 대안이 들어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을 꼭 분리할 필요는 없다. 파사가 곧 현정이다. 한국의 (보수) 언론은 파사 기능을 전혀 못하고 그럴 역량도 없다. 오히려 역기능만 하고 있다. 뒤집어서 파정현사(破正顯邪)만 열심히 하고 있는 꼴이다.

또 엄격히 말해서, 앞으로 올 제도나 사회, 종교는 민중이나 신(하나님)이 결정할 일이다. 하늘의 뜻(天命)이 따로 없고 씨알(민중)의 뜻이라면 뜻이다. 전체가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은 ‘돈 없는 사회’를 꿈꾼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한국식 자본주의는 얼마안가 모두를 질식시키고 말 것이다. 그것을 해쳐나갈 방안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국민의 뜻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 그때그때 새 방안을 모색, 실험할 수 있다. 그래서 지역자치가 필요하다. 사회개혁론이나 사회혁명론, 그 연장선상에서 사회진화론이 다양하게 전개, 실험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과도기적으로 연방국가가 이상적이다. 연방이 아닌 중국은 발전의 한계에 곧 부딪칠 것이고 그대로는 결국 해체되고 말 것이다. 대국으로서 존재할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종교가 달라져야, 하나로 통일되어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떻게, 어떤 형태로 되어야 하는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결정할 일이다. 곧 민중이 선택하는 대로 되어진다. 함석헌이나 어떤 개인이 예측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일 터이다. 종교만이 아니라 교육, 언론 등 사회 모든 면에서 자정능력을 상실한 한국사회에서는 더구나 가늠할 수 없다. 새 종교의 씨앗이 서구에서는 서서히 태동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것을 눈여겨보는 것이 우리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위에 인용한 마지막 글은 생태 환경에 대한 함석헌의 깊고 넓은 생명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인간 중심의 사고만으로는 인간생명도 지켜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구제역파동에서 보듯 동물을 무자비하게 학대하고 4대강 개발에서 보듯 자연을 파헤치고 파괴하는 행동은 우리의 생명관이 얼마나 천박한가를 드러냈다. 함석헌과 간디의 비폭력 원리는 우주적인 통찰에 뿌리하고 있다. (교육, 사회윤리, 생태환경 이외의 다른 주제들은 〈함석헌학회〉가을 학술발표회에 맞추어 다루어질 예정이다.) (2011. 3.30, 김영호)

김영호 교수님은
인하대학교 명예교수다. 선생님의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에서 영향을 받은 다원주의다.

선생님은 늘 사회변혁을 갈망하였다. 하여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979)에 간여하였으며,『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지낸 바 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부회장 학술위원장직을 거쳐 함석헌학회 학회장을 맡고 있다.(2011년 8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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