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영호 교수 칼럼

"깨어있는 시민이라야 산다"-노무현이 남긴 메시지 1

by anarchopists 2019. 12. 21.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05/30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깨어있는 시민이라야 산다”
노무현이 남긴 메시지(1)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간지 벌써 2년이 되었다.
그 충격으로 김대중도 연이어 갔다고 하면 우리는 한꺼번에 최소한 그래도 괜찮았다고 (또는 위대했다고) 평가되는 두 대통령을 잃었다. 그것은 정치 자문을 해줄만한 정치인을 갖지 못한 결과가 된 것이다. 사방이 막힌 듯한 막막한 상황에서 마지막에는 고개를 돌려 바라볼 수 있는 (말하자면 함석헌 같은) 나라의 어른, 정신적 지주가 없는 처지에서 현실적인 자문역조차 없어진 셈이다. 그래서 미국의 카터나 클린턴처럼 합리적이고 공의로운 전직 대통령이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고 필요할 때는 가끔 한 마디씩 날려줄 수 있는 사회가 부러운 것이다. 노무현이라도 봉하마을에 버티고 있었다면 나라와 정치판이 이렇게 무주공산 같지는 않을 것이다. 노무현의 꿈은 반칙이 통하지 않는 원칙 있는 사회의 확립이었다. 4.27 보선결과 여야 대선후보로 부각된 선두주자들이 겨우 수구정당 한나라당에 뿌리를 둔, 노무현의 평가대로, 반칙주의자, 기회주의자 꼬리표를 뗄 수 없는 인물들이다. (5.16 쿠데타는 오늘의 현실을 초래한 반칙이었다.)

무책임하게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버린 그는 그래서 진짜 바보로 보인다. 그의 자살은 그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일이었다. 그 사건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조차 주저하게 만든다. 모처럼 대통령 출신 원로로서, 그리고 자라는 청소년의 롤 모델로서 우리 옆에 남기를 기대했는데 그 꿈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셈이다. 정치는 이상주의만으로는 할 수 없고 대화와 타협이 필요함을 체득했다고 하면서도 그는 이상주의자면서 운명론자(“운명이다”)로만 보이게 만든 것이다. (편집된 자서전 명칭을 하필 ‘운명이다’로 붙인 것은 노무현 자신과 추종자들이 표방하는 진보적인 입장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숙명론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생시보다 갈수록 유리하게 되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하나는 그의 생시에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알려지면서이고, 다른 하나는 현직 대통령의 통치실적과의 대조에서 그의 업적이 선명히 부각되기 때문이다. 첫째 이유는 수구적 주류언론의 사실왜곡과 정보조작으로 인한 것이다. 이 언론 카르텔은 후보시절부터 맹랑하게도 노무현을 ‘좌빨’로 몰고 사소한 일을 침소봉대했다. (김대중 정권 때도 시작부터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들어난 하찮은 옷 로비 사건으로 물고 늘어졌다.) “잃어버린 10년”은 증명 되지 않은 허구적 선전 문구였다. 어리석은 백성은 이에 넘어갔다. 오히려 10년 쌓아놓은 밑천을 다 까먹으면서 그나마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하는 우매한 정권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10년 동안 얻은 모든 것을 잃고, 1년이 10년 같은 3년 동안 총합 30년을 잃고 있다. 그만큼 다음 정권은 궤도를 수정, 복원시켜야 된다는 말이다. 그가 왜 집권기간 내내 언론과의 일전을 불사했는지 이해가 된다. 그는 언론권력, 시장권력을 시민권력을 제어하는 권력으로 경계했다. 이 두 권력이 유착하여 정치권력이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들고, 함석헌의 표현으로, 서로 짜고 민중을 짜먹고 있다. 언론재벌까지 만들고 권언유착에다 경언유착까지 한 형국이다. (이 언론들은 이미 정권의 주구가 된 관제 방송매체와 더불어 보나마나 서거 2주기 행사를 철저히 외면했을 터이다.)

따라서 노무현을 평가하기 전에 그의 사고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싣는 글은 자서전과 인터뷰 기록에서 뽑아본 것이다. 그의 통치철학이 농축되어 있는 그의 글과 말 속에 한국정치의 현주소와 나아가야할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그의 사색의 결론은 사회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이(지배하는 사회)라야 산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의 방법론을 연상시키는 통찰이다. 각성된 시민이나 각성된 국민(민중)이나 마찬가지 말이다. 또한 노무현도 함석헌처럼 역사의식을 중시했다. (이 정도의 철학과 의식을 가진 대통령이 얼마나 있었던가.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지역구도 해소는 나의 필생의 정치 목표입니다. 나는 여기에 내 모두를 걸었습니다. 결국은 그 때문에 대통령이 되었으나, 정작 나는 아직도 이 목표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나는 국민들이 어떤 평가를 하든, 이 문제가 해결되거나 큰 진전이 있기 전에는 스스로 성공한 정치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보가 되고부터는 동거정부, 대연정 등의 대타협의 정치가 아니고는 우리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정치 지도자는 공공재를 관리해야하는 사람인데 그것을 잘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한다. 바보라는 얘기가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영악하지 않았다, 이거 아니겠습니까? 공공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신뢰라고 얘기하는 것인데, 신뢰와 원칙을 위해서 자기 이익을 포기한 사람한테 붙여준 애칭이 바보 아니겠어요, 무릇 공동체 살림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면 바보로 살아야 합니다.

“CEO라는 것은 자기 집에, 자기 호주머니에 부를 끌어 모으는 사람입니다. 근데 아까 말했다시피 정치 지도자라는 것은 여러 사람의 호주머니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경제 분야로 따진다면, 부자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역할을 하는, 공공재를 키워나가는 사람입니다. 정치 지도자는 공공재를 확충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개인을 살찌우는 기술이 아니라 늘 공공재를 생각해야 합니다. 시장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시장에서 공정한 게임이 이뤄지게 해야 하는 거지요. 경기장을 공정하게 만들고 시장의 게임을 공정하게 운영하도록 그렇게 관리해 나가는 사람이 정치 지도자, 정치의 역할이거든요.

“조중동이 경제, 경제 하면서 밀고 가는데 그 프레임에 빠져가지고 전부 경제, 경제 하고 있어요, 진보언론이라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죠. <한겨레> 독자들이나 <경향>독자들도 다 경제를 1번으로 꼽을 걸요?

"(이명박 씨는) 구시대, 특권과 반칙 시대의 CEO거든요. 시장이 공정하던 시대의 CEO가 아닙니다. 특권과 특혜로 돌아가던 그 시절에 유능했던 CEO니까 그 사람은 공정 경쟁이 요구되는 요즘 시대에도 안 맞고, 그야말로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투자 국가에도 안 맞는 거죠.

"2002년 내 승리는 나의 독특한 인생사 때문입니다 나는 부산에서 입신해가지고, 호남의 표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영, 호남을 어느 정도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있었던 거지요. 청문회 스타라고 해서 인지도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고집스러운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겹쳐져서 그때 바람을 만들어낸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 승리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경우다 이거죠. 내가 아니면 이 시기에 진행된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내가 한 일들은 역사적으로 시간을 조금 앞당기는 것이지, 결국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옛날에는 지도자 한사람의 노력이 역사를 바꾼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는 아닙니다.

“그래서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이 지금 서로 갈등하고 있는 것이죠. 이 가운데서 어떻든 간에 권력을 위임하고 지배를 거부하는 과정이 지금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나는 시장권력은 수단일 뿐이고 최종적으로는 정치권력, 국가의 책임이다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국가 권력의 정통성이 우위에 있어야 된다고 보는 쪽입니다. 그렇다면 시장권력보다 국가권력이 우위에 서게 하는 방법은 뭐냐? 시장에서 승자와 패자를 모두 포함해서, 시장의 소비자까지를 포함해서, 이른바 시장권력의 상대편에 서 있는 소비자 권력을 조직하고 이들을 정치권력으로 묶어내고, 정치권력으로 시장을 통제함으로써 시장의 효율과 정의를 유지해 나가자는 거지요, 이게 말하자면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인 프로세스 아니겠습니까? 시장의 강자를 통제하기 위해서 시장의 다수 소비자가 정치권력을 중심에 세우고 이 정치권력이 시장의 강자와 약자를 통합 조정하게 하는 것이죠. 정통성 측면에서도 그게 맞지요. 여기서 언론권력은 하나의 축입니다. 언론권력은 과거에는 전제군주나 귀족특권 세력과의 싸움에서 시민의 편에 섰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시장권력 편에 서기도 하죠. (2011. 5.30, 김영호 내일계속)

김영호 교수님은
인하대학교 명예교수다. 선생님의 전공은 종교철학(원효사상)으로, 세계관의 큰 틀(패러다임)은 함석헌과 크리슈나무르티에서 영향을 받은 다원주의다.

선생님은 늘 사회변혁을 갈망하였다. 하여 해외 민주화운동의 도구인 민중신문』(캐나다) 창간(1979)에 간여하였으며,『씨알의 소리』편집위원, 함석헌기념사업회 씨알사상연구원장을 지낸 바 있다. 지금은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와 함석헌학회 부회장 학술위원장직을 거쳐 함석헌학회 학회장을 맡고 있다.(2011년 8월 현재) /함석헌평화포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