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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함석헌의 월경하는 언어(말-법)

by anarchopists 2020. 1.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8/10 06:54]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월경(越境)하는 언어(말-법)

인류학에서는 경계 혹은 위험한 시공간을 ‘임계점’(臨界狀態, liminality)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문지방’을 뜻하는 라틴어의 ‘limen’이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서, 인간의 실존적인 변화, 사회적 지위나 상태의 변화 등을 의미하는 통과의례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 발견되는 인간 사회의 통과의례(이를테면 탄생, 사춘기, 결혼, 죽음 등)는 각 단계마다 애매모호함, 위험함, 비결정적인 상태 등을 일컫는 극도로 위험한 긴장상태로서 경계에 있는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임을 알게 해줍니다.

이렇듯 삶의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넘어-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의례(ritual)를 통한 어떤 힘, 종교적인 초월성, 인간의 합의나 인정, 제도, 권력 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과 더불어 인간은 근본적으로 ‘언어’를 통해 ‘사실’(fact/history)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음으로써 삶의 위기를 넘어서게 됩니다. 이른바 이성적 언어가 갖고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함석헌의 언어(말-법)에는 그 힘이 있습니다.
함석헌에 따르면, “사실을 삭여서 살로 만드는 것이 사색”입니다. 인간의 역사적 사건, 삶의 질곡들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경험에 의해서 사실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사실이 사실로서만 남아 있게 되면 아무런 의미가 발생되지(Ereignis)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경험적 사건이 하나의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삭여서 어떤 맛이든 우러나야 합니다. 그 역사적 사건 혹은 개인의 사실은 삭이고 곰삭여서 의미와 성찰이 우러나게,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함석헌은 여기에서 현재의 삶의 영역이나 경계가 의미를 갖고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곰삭인 사실이 ‘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사실을 단지 곰삭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곰삭여서 우러난 의미가 살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감각의 주체이자 실존인 나의 몸에 의미가 아로 새겨져야 역사적 사실이 비로소 내게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살로 만드는 인간의 도구가 무엇입니까? 함석헌은 “사색”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처해져 있는 교육․역사․정치적 위기, 생태․생명적 위험 등은 인류학적 의미에서 임계상태입니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월경언어 즉 위기와 위험의 영역을 넘어서게 만드는 언어(행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함석헌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사색’이라는 것과 매우 밀접한 행위입니다. ‘사색’이란 인간이 깊이 생각하고 헤아리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 실존 앞에 나타난 사태를 깊이 또 깊이 생각하고 곰삭여서 그 의미와 성찰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 곧 “사색하여 나온 것이 이해”입니다. 사실을 곰삭여서 다시 풀어내는 것입니다. 풀어 놓고 헤쳐 놓아야(해체적 구성) 비로소 사실이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것이며 삶의 역사라 불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함석헌은 “녹이고 삭이는 것이 이성”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적 사건, 개인의 사실이나 사태(Sache)가 삶의 질곡과 고통, 그리고 아픔과 위험(위기)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을 풀어서 밝히는 것이 사색하는 이성이라는 말입니다. 이성(理性, ratio)이라는 말에는 계량적 의미, 수치․수학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능력과 합리적인 비판적 능력을 일컫습니다. ‘비판’이라는 말마디를 잘 분석했던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어떤 것을 다른 어떤 것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하다(eines gegen das andere abheben), 어떤 것을 다른 어떤 것에 대하여 돋보이게 하다(hervorheben), 또는 경시하다(zurückstellen) 등이 크리네인(krinein)이다. 바로 그러한 위기(Krisis)에서 비판적인 것(das Kritische)이 연원한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에 비판적 언어가 필요한 것은 결국 사회의 모든 영역이 총체적 위기라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그 위기의 임계점의 돌파구는 비판적 언어와 이성, 그리고 함석헌이 그렇게도 강조하던 깊이 생각함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말하는 사색하는 이성, 생각하는 사색은 모두가 비판적 능력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은 임계점에 와 있습니다. 정치, 미디어, 경제, 사회, 문화, 시민의식, 국방, 교육 등. 물론 이 모든 영역, 혹은 세계는 현정권의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실을 사실로서 놓아둔다면 우리에게는 사건이 아니라 사건조차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이성적 숙고, 비판적 사색이 없는 한, 곰삭여 뼈 속 깊이 내 몸 안으로 들어 온 의미가 발생되지 않는 한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함석헌의 저서와 강연은 당시 임계상태에 빠진 우리의 삶에서 해방을 가져다주고 도탄에 빠진 씨알의 의식 상태에서 일어날 힘을 주는 월경의 언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 구석구석은 그러한 월경의 언어가 생성되어야 합니다. 경계에 서 있고, 위기의 선상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우왕좌왕하면서 이성과 감성마저도 조작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매서운 월경언어가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때에 그 언어를 누가 찾아 줄 것이며, 누가 말할 것입니까? 함석헌의 말-법이 그립습니다(2010/8/10,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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