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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남북대화의 종식 이전에 이념적 대립의 종언부터

by anarchopists 2020. 6. 23.

남북대화의 종식 이전에 이념적 대립의 종언부터

 

적은 우리 자신 내면에 있습니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파괴된 현시점에서 남북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4·27판문점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에서 일군 쌍방의 약속과 평화통일을 위한 순차적인 노력도 사라진 듯 보입니다. 하지만 대화는 계속해야 합니다. 상징은 상징으로 두고 관념/(정치)이성이 다시 현실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현실과 정치, 경제와 폭력적 도발, 국가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은 관념의 종이 되어서도, 물질적 권력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는 어느 지점에서의 행동이라고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결코 북한이 자본주의사회나 민주주의 체제는 아닐지라도 그들 내부에 심각한 정치경제적 리스크(risk)가 있다는 분석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무모한 처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이야기만 나왔다하면 공산당 혹은 공산주의를 연상하는 섣부른 버릇이 있습니다. 사실 서양철학사의 흐름에서 헤겔(G. W. F. Hegel)의 관념론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에 반기를 든 것은 헤겔좌파에 서있었던 칼 마르크스(K. Marx)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물론을 주장했다고 해서 관념론 일체를 버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질적 세계 안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관념을 지배하는 외부적 구조나 어떤 이데올로그(ideologue)가 작동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사태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도 어떤 학습된 관념화, 즉 이데올로그가 편견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왜 우리는 북한을 민족적 정체성을 지닌 한 인간집단의 특수성으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또 왜 우리는 어떤 일정한 집단 혹은 국가체제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그 이념적 표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일까요? 마치 절대적 진리인 양 말입니다. 이데올로그는 어떤 관념에서 더 나아가 마치 신적 직관(eidon, idea)과도 연관이 되니 관념 자체가 절대적 진리처럼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관념이든지간에 그것이 주체의 관념이 아닌 이상 국가체제의 이데올로그나 집단의 목소리와 등치시킬 수 있는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반도의 역사를 보면 외부의 이데올로그에 의해서 개별자의 절대적 자유를 유린하면서 분단이 초래되고 그로인해 같은 민족이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던 뼈아픈 역사를 잘 성찰해야 합니다. 관념이든 아니면 물질이든 그것도 아니면 물질 속의 관념(아리스토텔레스)이든 현실(reality)을 배제한 상태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관념이 현실화되어야 의미가 있고, 물질도 관념적 형상화로 나타나야 속물적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남북/북남의 두 대표가 만난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민족의 오랜 문제에 새로운 물꼬가 터지면서 통일이 곧 올 것 같은 희망이 보였습니다. 이른바 관념의 형상화였습니다. 그러나 관념의 형상화, 물질의 관념화가 되는 기적만큼이나 요원한 사태로 흐지부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북/북남의 문제는 세계시민적 관점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민중에 의해 권력을 위임받은 일개 존재가가 어떤 정치철학이나 정치이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국정을 운영하고 국제정치를 풀어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판단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그게 모든 개별시민의 절대 자유와 자율을 넘어선 이념적 강제성을 띤다면 문제는 다릅니다. 대표성을 지닌 존재자의 국정철학에 동조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절대적 진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이념과 정치철학을 인정하고 의사소통하면서 나라를 운영해 나가는 겸손한 심부름꾼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개별시민 역시 모든 판단을 특정 존재자에게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위임은 나의 정치철학과 통일의식이 확고한 상태에서 신뢰성 있는 자세로 이루어진 용기 있는 결단입니다. 그렇다면 개별시민의 관념과 이념은 무엇인지 스스로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필자는 독일철학자 칸트나 한국의 철학자 함석헌처럼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남북/북남의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념의 문제로 막혀 있다고 해서 국가가 나서서 혹은 문제를 풀어야 할 당사자가 아닌 제3의 강대국들이 개입해서 정치적 해법을 찾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이념과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서 세계시민적 주권 정신을 가지고 북한을 바라보고, 우리의 통일문제나 외교문제를 스스로 풀어가야 합니다.

통일과 평화의 아르케(arche), 곧 시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경제적 해법, 정치적 외교술, 국제정치적 전략 등 온갖 방법들에서 기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과 이념 혹은 물질 어느 경계 사이에서 추의 균형을 어떻게 저울질할 것이냐에 달려있습니다. 현대 유럽의 대표적인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 Agamben)은 ‘장치’(dispositif)라는 개념을 철학화한 인물입니다. 그에 따르면 장치는 담론, 제도, 법, 철학적 명제 등의 이질적 집합 사이에 있는 전략적이고 권력관계적 개념입니다. 북한을 적대적 관계로 보도록 만드는 것, 그것을 미디어나 정치적 역학관계로 이용하려는 시도, 더 나아가 국제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것까지 어쩌면 지금의 사태는 바로 어떤 장치가 작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때 개별시민이 깨어서 세계시민적 관점으로 이데올로그와 관념론과 유물론 그 외에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장치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남북/북남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그것을 무전제의 시원에서 보자고 제안하고자 합니다. 편견 없는 아르케, 지배 없는 아르케,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사유로서 바라보는 아르케, 세계의 모든 시민들이 연대하여 상호부조할 수 있는 아르케. 그 장치는 개별시민 혹은 개별민중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이념과 영토적 경계를 넘어서 개별민중이 서로 서신을 교환하고 마을과 마을이 이어져 왕래를 하면서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힌다면 폭력도 전쟁도 사라지는 것은 물론 통일도 성큼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라고 하는 국가의 이념체제와 이데올로그 그리고 칼 마르크스를 왜곡·변형시킨 구소련 공산당의 환영(幻影)이 우리에게 장치가 되어 이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새로운 세계시민적 철학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개별민중이 원하는 것은 다시 무력(武力)이 아닙니다. 무력(武力)은 서로를 무력(無力)하게 할 뿐입니다. 이를 쌍방의 지도자들이 잘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들이 함석헌의 말처럼, ‘민중을 내는 일(公務)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공(公)을 빼앗아 먹는 지도계급’이 되어버린다면 어느 정치체이든 공(共)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사(私)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가 강조하듯이, 옛날 국가는 쓸데없습니다. “생존경쟁철학, 세력균형주의로 되는 폭력의 나라”는 지양해야 합니다. 모든 낡은 관념도 버려야 합니다. 제국주의의 낡아빠진 사상은 물론 민족지상주의도 극복해야 합니다. “싸우는 대립만이 대립 아니라 참 대립은 협동하는 대립”입니다. 지금의 개별민중의 통일감정은 ‘인간의 자기분열이나 자기대립을 넘어서서 살기 위해서 전쟁을 버리는 세계평화운동’으로 분출해야 할 것입니다.

“인화(人和)를 하도록, 마음이 하나 되도록 힘을 써보는 것이다. 꿈틀거림은 화합(和合)운동이다. 하나 되어보려고 꿈틀거려 보는 것이다. 서로 불평만 하고 누워있으면 못 쓴다. 그것은 책임을 남에게 떠미는 것이다. 그래 가지고는 위기(危機)는 못 이긴다.” 함석헌의 말입니다.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간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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