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함석헌의 생태적 언어와 자연환경

by anarchopists 2020. 1. 1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08/1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생태적 언어와 자연환경

우리가 ‘환경’(Umwelt; Environment)이라고 말할 때 크게 보면 자연환경과 인간환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시 인간환경이라 하면 도시환경, 학교환경, 주거환경 등 여러 영역으로 세분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제부터 논의되는 대상은 ‘자연환경’에 국한시켜 전개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한다면 항상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그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조건과 다른 개체들은 탈중심적 존재의 주변으로 밀려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환경의 주인은 항상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독일어에서 ‘환경’을 뜻하는 말인 ‘움벨트’(Umwelt)는 풀어 쓰면 ‘둘러-있음의-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um’은 둘레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것처럼 세계의 중심인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조건 일반을 정확하게 말해줍니다.

그러나 ‘둘러-있음의-세계’는 다시 ‘세계를 위하여(um) 있음’이라는 존재 방식과 동일한 언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um’이라는 접두사는 ‘둘레’라는 뜻이 있지만, 동사 부정법과 함께 사용될 때는 ‘위하여’라는 뜻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둘러-있다는 것에 대한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한다면, 둘러-있는 존재는 모든 존재 일반이 서로 둘러-있음 속에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러-있음의-세계’는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가깝게 말입니다.

‘둘러-있음의-세계’에서 ‘um’ 즉 주위, 둘레는 앞에-있음(vor-lage), 곁에-있음(bei-lage), 밑에-놓여 있음(grund-lage)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연환경은 인간 앞에 실제로 현전하고 있으며, 바짝 다가서 있는 존재이고, 모든 인간들의 삶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가 있습니다. 자연환경은 우리 인간의 삶의 수단으로만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개별적인 생명 스스로도 자연환경 전체 속에서 여느 존재와 똑같이 ‘중심’으로서 살아가야 할 마땅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 인간과 아주 가까이에서 현전하고 있는 생명 존재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생태적 언어 즉 함석헌의 언어 속에 들어 있는 생태적 언어의 의의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의 언어는 자연의 소리를 닮아 있고 인간의 삶의 아래에 놓여(토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생태적 언어는 자연이 우리에게 말걸어 오는(Anspruch) ‘너’(Du)를 그대로 놓아두고(legen/lage/lassen), 인간이 자연 위에서만이 인간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에 함석헌은 부인할 수 없는 (자연) 세계의 현전을 생태적 해석으로 의미를 확장시킵니다. “하나님의 입이 있다면 산에 있고, 바다에 있고, 풀과 꽃과 벌레에 있고, 햇빛과 구름과 바람에 있다. 자연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자연은 벌레처럼 파먹기나 할 미끼가 아니요, 깊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요, 간결한 위로를 주는 친구다.”

함석헌은 자연에서 신의 현존을 봅니다. 사실 모든 것이 신의 현존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함석헌은 범신론자(汎神論者, pantheist)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인식이 신의 속성과 인격적 해석으로 이어진 것이요, 자연을 스승과 친구로 보는 이른바 상존적 존재이자 우리의 바탈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존재로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술은 자기 실현, 생활의 반성이다... 우리의 타고난 바탈은 놀랄 만큼 예술적이다”라고 그가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자연의 역사, 질곡의 역사를 닮은 예술이라는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이미 ‘정신’입니다. 인간의 정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존재입니다. 함석헌도 “그 나라 산수풍경이 그 민족의 정신생활에 주는 영향은 한없이 큰 것이다... 간 데마다 시요, 그림이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의 정신생활에 중대한 역할을 하는 자연을 유린하고 폭력을 가하는 행동은 민족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일인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정치경제적 자본의 이익에 따라 자연에 테러를 가하는 것이 자폭인지도 모르고 자행하는 선진국의 행동들은 결국 인류 전체의 시각에서 볼 때 ‘세계정신의 퇴보’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4대강 살리기’라는 명분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정부의 사업이 과연 무엇을 살리고자 하는 것인지를 되물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대강 사업이 궁극적으로 민족 정신의 함양이 아니라면, 함석헌의 말-법처럼 ‘금수강산’(錦繡江山)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금수강산’(禽獸江山)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재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통렬한 비판을 좀더 길게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아름다운 경치가 어디에 있는가? 금수강산이 아닌가? 그러나 금수강산을 금수강산(禽獸江山)으로 만든 것은 웬일인가? 도둑을 막지 못해 곰 같은 놈, 독수리 같은 놈, 돼지 같은 놈, 승냥이 같은 놈들이 들어와 마음대로 짓밟게 했으니 금수강산(禽獸江山)이 아닌가?”


역사적 입장에서 풀이를 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암시하는 바가 분명히 있습니다. 필자는 정부가 단순히 민초들의 욕설을 듣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석헌의 생태적 비판을 되새겨야 할 뿐만 아니라 자연은 민족의 정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환경정책을 입안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연환경 즉 둘러-있음의-세계는 우리나라의 민족 정신과 기백이자 민족의 이성과 감성으로서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우리 앞에 있으면서 정신적 존재인 인간을 떠받치는 생명적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 Thoreau, 1817-62)는 1841년 12월 31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건강은 사회가 아닌 자연에서만 찾을 수 있다. 정신과 영혼에 건강을 불어넣으려면 들판과 숲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자연의 한 가운데 발을 딛고 서지 않으면, 우리 모두 창백한 납빛의 얼굴이 되고 말 것이다... 자연의 조화에 심취한 이들은 정신적 절망 혹은 정치적 예속상태에서 빚어진 절망의 교의나 성직, 폭정 따위를 가르친 적이 없다.” 지금 우리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소로우의 생태감성적 혜안과 함석헌의 생태철학적 언어를 배워야 할 때임을 직시합시다!(2010/8/13 새벽, 김대식, 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