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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환경

함석헌의 생명관과 생태론적 시각

by anarchopists 2020. 2. 9.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8/11/17 13:22 Hwangbo]에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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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생명관과 생태론적 시각 (제1회 분)


장 회 익 (서울대 명예교수)


함석헌은 생명운동의 선구자인가?


김경재 교수는 함석헌의 학문과 사상을 개관하면서 “≪함석헌 전집≫ 총 20권의 핵심 화두는 생명이고, 생명의 구체적인 역동적 실재가 역사이며, 그 나선형의 운동을 이끌고 가는 하느님의 고난의 동반자가 씨 곧 민(民)”이라고 정리한 일이 있다. (김경재 교수의 글, [“삶과 신앙 안에서 피워 올린 깊은 민중사관”,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 교수신문 엮음, 생각의 나무 (2003), 제17장]을 참고 할 것)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함석은『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저작한 역사철학자이지만, 그가 보는 역사는 김경재 교수가 지적했듯이 ‘생명의 구체적인 역동적 실재’로서의 역사이지, 오늘날 우리가 흔히 교과서를 보는 것 같은 과거 사건들의 단순한 나열과 해설로서의 역사가 아니다. 그리고 그의 주된 활동이 바로 역사의 주체가 되는 씨 곧 민(民)을 각성시키는 일이었다고 하면, 이는 결국 그 뿌리가 ‘생명’에 가 닿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혹 그에게 요즘 흔히 말하는 ‘생명운동’의 기수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생명운동을 잉태시킨 선구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제 그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생명사상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자. 이미 언급한 함석헌의『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1930년경 해마다 열리던 ‘겨울모임’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호로 『성서조선(聖書朝鮮)』이라는 정기 간행물에 연재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일이기는 하나, 같은 시기 같은 모임에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이 책의 자매편이라고 할 수 있는『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가 또한『성서조선(聖書朝鮮)』에 연재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일은 1940년 일제 경찰에 선생이 체포됨으로써 중단되었고, 원고까지 소실되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이 글들 가운데 문명의 여명기까지를 다룬 내용이 전해져서 오늘날 우리가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1964년에 다른 몇몇 글들과 합쳐 출간을 보았는데, 그 후 다시 1983년에 ≪함석헌전집≫을 마련하면서 이 전집의 제9권에 재수록 되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가 단순한 한국역사가 아니듯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세계사’로서의 단순한 세계역사가 아니다. 이 책에는 자연과 생명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의 철학이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권의 책, 특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통해 함석헌의 우주관과 생명관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 함석헌은 우주와 생명에 대해 당시까지 알려진 과학적 사실들을 폭넓게 수용하면서 이와 관련된 자신의 관점과 사상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우주와 역사 그리고 생명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의 섭리에 따라 창조된 것으로 보면서, 이 안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고 그 안에 하나의 큰 삶이 흐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 그의 글을 통해 그가 생각한 생명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 나가기로 하자.

함석헌의 생명관과 생태론적 시각 (제2회 분)


장 회 익 (서울대 명예교수)


함석헌은 그의 책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상[非常]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창조된 것이다... 귀한 것일수록 큰 준비를 요하는 것이다. 이 역사를 보고자 이 대우주를 지은 것이다. 그러나 또 우리는 안다. 이 우주의 광대로 인하여 이 역사의 위대한 것임을.

그러나 이와 저는 서로 딴 것이 아니다. 이는 저의 안에 있는 것이요, 저의 꽃이요, 저는 이의 뿌리다. 이와 저는 하나를 이루는 삶 그것이다. 우주는 삶 그것이다. 자라는 것이다. 원시의 인간은 이것을 살았다고 했고, 산 것으로 대접했고 교섭했다. 과학은 이것을 죽은 것이라 하고 죽은 것으로 무시하고 약탈했다. [≪함석헌전집≫ 제9권, 33쪽]


여기서 함석헌은 역사와 우주를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역사는 우주 안에 있는 것이요, 역사는 우주의 꽃이요, 우주는 바로 역사의 뿌리이다. 그리고 역사와 우주는 “하나를 이루는 삶 그것”이라고 한다. 우주가 광대한 것은 이 역사의 위대함을 말해주는 것이요, 이 안에 이루어지는 삶은 그런 만큼 더 소중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을 보는 관점이 오늘날 고립된 하나의 개체로 보는 관점과 얼마나 다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생각이 ‘원시의 인간’ 곧 우리의 옛 선조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이른바 과학을 내세우는 오늘의 인간은 자연 그 자체를 죽은 것이라 보고 이를 약탈하고 있음에 대해 개탄하고 있다.

이 인용문만을 보자면 그가 마치도 자연 곧 우주를 인간의 생명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아마도 원시인들은 자연을 살아있는 별개의 존재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강조점은 그들이 이를 살아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 있는 것이지, 그들이 이를 자신들과 별개의 존재로 보았다는 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이와 저는 서로 딴 것이 아니다. ⋯ 이와 저는 하나를 이루는 삶 그것이다.”라는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살아있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는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이와 함께 함석헌은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역사는 결국 생명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 인용문을 보자.


생명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내놓으면, 역사를 말하는 자로서는 분외(分外)의 일인 듯이 생각하려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것은 철학이나 종교에서만 생각할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우선 수정되어야 한다. 역사는 결국 생명의 역사다. 국민의 역사이거나 인류의 역사이거나 문화의 역사이거나 천연의 역사[博物]거나 구경에 있어서는 이 대우주를 꿰뚫고 흐르는 대생명의 역사다.[≪함석헌전집≫ 제9권, 42쪽]


그는 인류의 역사, 문화의 역사, 천연의 역사를 구분하지 않고 그 안에 대생명이 흐른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다시 그 안에 나타나는, 그것의 주체인 인간 삶의 흐름과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다. 특히 그가 여기서 ‘천연(天然)의 역사’ 곧 자연사를 인류의 역사, 문화의 역사와 함께 강조하면서 이 모두가 결국 큰 생명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본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생명은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이 자연사의 흐름 속에서 빚어져 왔으므로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흐름을 이해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오늘 우리가 생명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짧은 것인가를 반성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함석헌의 생명관과 생태론적 시각 (제3회 분)


장 회 익 (서울대 명예교수)


흙으로 빚은 것 속에 신적인 것이 들어 있다.


한편 함석헌은 이러한 세계 그리고 그 생명을 현상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의미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자기까지를 그 한 분자로 함유하는 세계에 대하는 태도에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상적으로 대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의미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생물학자들의 모든 설명은 다 그것을 현상적으로 다루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태도다. 원래 이 세계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요, 의미를 가지는 존재다... 롱펠로우의 유명한 구절이 가르치는 것같이, “눈에 뵈는 그대로가 사실이 아니다.” [≪함석헌전집≫ 제9권, 42쪽]


이 점은 곧 주체로서의 생명 그리고 삶으로서의 생명에 의미를 부여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며,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의 생명 이해를 말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당연히 생명의 기원 문제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것 또한 의미로서의 존재 이유를 캐는 문제로 귀착한다.


사물의 기원이 다 그렇지만 더구나 생명의 기원을 찾는 것은 인간의 혼에서 나오는 요구이기 때문에 의미적인 태도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저에게 있어서 생명의 기원은 곧 자기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되어서 존재하게 되었다는 설명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는 있으나 이 생의 맨 밑에서 솟아 나오는 염(念)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생명의 성격이 어떤 것이며 그 존재이유가 무엇임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함석헌전집≫ 제9권, 44쪽]


생명의 기원 추구에 대한 이러한 선언과 함께 그는 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명의 성격 즉 현상으로서의 생명 이해가 주체적으로 파악되는 생명의 주요 특성, 예컨대 “자유에 향한 노력”이라든가, “비약성을 가진 것”이라는 점들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특히 이러한 생물학이 생명의 존재이유에 대한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함을 통렬히 비판한다.


생물학에서도 생명의 특질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본에 있어서 현상적인 그것은 여기서도 단순히 이화학적(理化學的)인 설명을 할 뿐이다. 탄소․질소의 복잡한 분자식을 가진 것이라느니, 성장을 하는 점이라느니, 영양을 취하는 것이라느니, 생식을 하는 것이라느니 하는 등이다. 그러나 생명의 의미를 찾는 자에게 이는 동문서답이다. 그런 것을 가지고 혼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보다도 왜 생명이란 자유에 향하는 노력이라 하지 않는가? 왜 생명이란 비약성을 가진 것이라 하지 않는가? ··· 지자(智者)의 우(愚)는 이런 것이다.

생명의 존재이유에 관하여는 생물학은 전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기원을 말함은 어리석은 일이다. [≪함석헌전집≫ 제9권, 44-45쪽]


그렇다면 함석헌은 이러한 문제의 답을 어디서 찾으려는가? 그는 이 점에서 일종의 종교적 직관을 제시한다.


절대자가 자기 스스로 즐겨 자신을 한정하여 만물 속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사랑이다. 자기가 만일 영원히 자기를 주장한다면 영원의 죽음이 있을 뿐이요, 생명은 없다. 생명은 자기가 시시각각으로 자기를 포기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 사랑의 도가 우주의 도다. 그러므로 생명의 기원은 이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에 있는 것이요, 그 존재이유도 이 아가페로써 일하는 하나님의 즐거움에 있는 것이다. [≪함석헌전집≫ 제9권, 47쪽]


함석헌의 생명관과 생태론적 시각 (제4회 분)


장 회 익 (서울대 명예교수)


그렇다고 하여 함석헌이 생명에 대한 물질적 바탕을 결코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생명이 물질적 기반과 그 역사적 과정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는 정신의 세계 혹은 영성(靈性)의 세계가 출현함에 있어서 인간이 지닌 두뇌의 존재가 그 물질적 기반이 되고 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포유류가 영장류(靈長類)를 내고 영장류가 뇌를 발달시킴에 의하여 한 새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뇌는 오직 그 세계의 터가 될 뿐이다. 그 세계를 정신의 세계 혹은 영성(靈性)의 세계라 한다면, 뇌는 그 정신 그 영성의 숙소에 지니지 않는다... 그것을 해부해보고 분석해보아도 종래 동물에 있던 신경중추와 아무 다른 것 없음을 볼 것이다. 그러나 눈은 모든 것을 가 볼 수 있는 기관이 아니다. 시험관 속과 저울판 위에는 아니 남아도 사실에 있어서 본능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어떤 딴 것이, 물질로 붙잡을 수는 없는 어떤 것이, 새로 덧붙여진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어떤 새 것이야말로 새 세계에 통하는 길이므로 한도 있는 것이었으나, 이것은 생명의 자기 내부에 통하는 길이므로 무한이다. 전자가 조건에 복종하는 순응자였던 대신에 후자는 자유의 세계에 발원하는 자유자다. 그러므로 우리는 뇌라는 일점에서 두 개의 세계가 연접함을 본다. 위에 있는 영계(靈界)와 아래 있는 육계(肉界)다. 어떻게 되어서 그 연락이 되는지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과연 흙으로 빚은 것 속에 신적인 것이 들어 있다. [≪함석헌전집≫ 제9권, 71-72쪽]


이와 함께 함석헌은 생명의 존재론적 성격 특히 물질과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직관적 통찰을 시도한다.


생명의 생명된 점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요, 물질적인 것이 아닌 데 있다. 저울이나 자로 헤아릴 수 없는 것에 바로 생명적인 것이 있다. 그렇게 말함은 반드시 생명이 물질에서 떨어져 있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지상에 있어서는 생명은 영원히 물질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물질 그것은 아니다. 마치 광명이 암흑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으나, 그러면서도 결코 암흑 중에 있지는 않는 것과 같다. 광명이 광명된 까닭은 암흑에 붙어있으면서 항상 암흑을 부정하려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처럼 생명도 물질에 붙어있으면서 물질을 부정하는, 이기는, 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만일 정신적인 것이 종래 나타나지 못하고 말았다면 이 우주에는 생명은 없었으리라고,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조차 없었으리라고. 유물론자가 생각하는 것같이 물질이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신적 생명이 있어, 뜻이 있어서 물질세계는 존재가 가능하게 된다. ··· 생명은 그 본질로는 있는 자나 역사적으로는 항상 있으려 하는 자다. 그리하여 있으려 하는 데서 물질이 나오고, 식물․동물이 나오고 세계가 나온다. [≪함석헌전집≫ 제9권, 78-79쪽]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생명을 물질과 본질적으로 상호배제적인 성격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가 없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는 이른바 이원론적인 관점과 구분되는 것으로, 본질과 역사라는 두 측면을 지닌 일원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 본질로 보자면 생명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나, 그 있으려는 성격을 통해 물질이 나오고, 식물․동물이 나오고 세계가 나온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유심적 일원론과 흡사한 존재론이라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우리가 그의 글을 통해 읽어야 할 것이 그가 바탕에 깔고 있는 철학적 사변이라기보다는 그 안에 그가 찾아내고 있는 삶의 의미라고 하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의 생명관을 특정의 존재론적 관점과 관련해 파악하려 하기보다는 그가 이 안에서 전하려고 하는 삶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함석헌의 생명관과 생태론적 시각 (제5회 분)


장 회 익 (서울대 명예교수)


모든 생물, 무생물, 티끌까지도 다 나이다


그는 생명 안에서의 정신 혹은 영성(靈性)의 출현이야말로 생명의 존재이유를 구현해 주는 중요한 역사적 전기를 이룬다고 보고 있다. 아무리 하느님이 사랑으로써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하더러도 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사랑으로 보답해낼 존재가 없다면 그 의미가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이를 확보한 인간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제 생명의 역사의 여명기가 왔다.... 의식의 시대가 시작된다. 정신의 생활이 시작된다. 영의 나라에 길이 열리려 한다. 엿새 동안의 창조를 끝맺는 아담․하와의 창조가 되고, 저의 입으로 만물을 명명하고, 온 우주가 그의 생활내용이 되어 저가 만물을 거느리고 그에 대한 책임자로 스스로 짐을 지고, 조물주의 앞에 서서 생활의 첫 걸음을 힘있게 내놓는 날이 온다. [≪함석헌전집≫ 제9권, 73쪽]


그러나 인간은 전체 생명과 분리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는 오직 하나로 연결된 전체 생명 안의 일 부분이다. 다음 글을 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생명이란 말을 아무 분별없이 써왔으나 생명은 일양한 것이 아니다. 생명은 평면적인 것, 공간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시간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바늘 끝의 한 방울 물에 그 세계를 가지는 미생물로부터 믿음으로 인하여 새로 나서, 부는 바람과 같이 그 오는 곳도 알 수 없고 가는 곳도 찾을 수 없는 영에까지 이르는 생명의 역사는 진화론자가 보는 것같이 직선적인 것도 아니지만, 또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아무 관계없이 고정한 같은 평면의 세계에 굴러다니는 것도 아니다. 서로서로 제각기의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도약에 의한 상승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계단적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최종의 계단이 인류에 의하여 도달되었다. 저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것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질을 이기려는 힘이 최후의 일약으로 영계를 향하여 양쪽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최상점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함석헌전집≫ 제9권, 79-80쪽]


여기서 우리는 함석헌이 인간을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그의 인간 중시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그의 ‘씨’ 사상과 연결되는 마디를 이룬다. 그렇다면 ‘씨’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그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자.


씨이란 말은 씨라는 말과 알이란 말을 한데 붙인 것입니다. 보통으로 말하면 종자라는 뜻입니다. ··· 여기서는 그것을 빌어서 민(民)의 뜻으로 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쓰이지 않으나 여기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씨",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씨에게 보내는 편지-, 107쪽]


그렇다면 함석헌은 왜 굳이 이런 생소한 용어를 채택하여 자신의 핵심사상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그 해답을 우리는 그의 사상이 지닌 독창성과 관련해 찾아보아야 한다. 기존의 용어를 채택할 경우, 기존의 용어가 이미 지니고 있는 한정된 의미규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는 인간에 대해 그가 이해한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 내용은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그가 도달한 인간 이해를 의미하며,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민(民)을 의미하는 것이다.

함석헌의 생명관과 생태론적 시각 (제6회 분)


장 회 익 (서울대 명예교수)


그러므로 함석헌의 씨을 단순한 민(民)이나 민중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각성된 인간,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다 함께 ‘나’로 보는 인간, 아니 모든 생물, 무생물, 티끌까지도 다 ‘나’라고 생각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다시 다음의 글을 보자.


나는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과 같이 있다. 그 남들과 관련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와 남이 하나인 것을 믿어야 한다. 나․남이 떨어져 있는 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상대적 존재다. 그러므로 나․남이 없어져야 새로 난 ‘나’다. 그러므로 남이 없이, 그것이 곧 나다 하고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 무생물까지도 다, 티끌까지도 다, 나임을 믿어야 한다.

[이 인용문은 오강남 교수의 글 “함석헌의 씨사상과 도마복음” 『씨』 6호 (2008, 8월), 8쪽에서 재인용한 것이나, 원전 출처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나’ 곧 씨에 도달할까? 그는 이것이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온다고 본다.


생각하는 씨이라야 삽니다. 씨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씨입니다. 생각 못하면 쭉정이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이요, 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 물질 속에 와 있는 정신입니다. 유한 속에 와 있는 무한입니다.

시간 속에 와 있는 영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들면 삽니다. 반드시 삽니다.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씨에게 보내는 편지-, 120쪽]


결론을 대신하여


이제 우리는 필자가 그 동안 제안하고 강조해 온 ‘온생명’의 관점에서 이제까지 논의한 함석헌의 생명사상을 간략히 정리해 보자.

우리의 생명 개념을 이해의 단위에 따라 온생명적 생명 이해와 낱생명적 생명 이해로 구분하고, 다시 주체와의 관계에 따라 객체적 생명 이해와 주체적 생명 이해로 구분한다면, 함석헌의 생명 이해는 생명의 우주적, 역사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온생명적 생명 이해에 접근하고 있으며, 또 그가 철저히 의미적 관점에 서 있다는 점에서 객체적 생명 이해보다는 주체적 생명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주로 낱생명의 관점에서 객체적으로 생명을 파악하려는 ‘생물학적’ 생명 이해와는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관점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가 생물학적인 생명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생명이 지니고 있는 물질적 측면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면에서 그는 물질과 생명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으며, 생명이 지닌 역사적 성격을 파악함에 있어서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오직 그가 강조하는 것은 생명을 물질적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한편 그 자신 온생명은 물론 여타의 전체론적 생명관에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낱생명적 관점에서 벗어나 전체론적 이해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사상이 지닌 독창적이고 직관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생명 이해는 실천적 함의를 듬뿍 품고 있는 각성된 삶의 주체 곧 ‘씨’ 개념에서 커다란 결실이 맺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그의 생명 이해는 생명의 근원을 신의 창조에 근거 짓는 종교적 차원과 연결되고 있다. 이는 물론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 역사”라는 그의 논의 주제로 보아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그가 말하듯이 “이 생의 맨 밑에서 솟아 나오는 염(念)을 만족”시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그의 성품의 한 단면을 반영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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