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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환경

[김대식 제5강] 함석헌의 자연해석학-삶이요, 숨이요, 돼감이요

by anarchopists 2020. 2.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06 09:3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자연 해석학_“삶[生]이요, 숨[命]이다. 돼감[歷史]”

자연은 우리 정신교육의 교과서이다.

“사람이 하는 것은 행동이다. 그저 걸어가는 것이다. 가고 가고 또 가는 것이 인생이요, 우주요, 생명이다.”
이런 함석헌의 논조 속에는 모든 것은 머물지 않고 단지 쉴 뿐, 그저 걸어감, 살아감, 찾아감 일 뿐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삶[生]도 숨[命]이 되어[生命] 끊어지지 않고 가고 또 가는 것, 그래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역사(歷史, 돼감) 아니던가요? 함석헌의 정신을 헤아려보면, 그 질긴 역사의 바탕에는 인간의 무늬(人文)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무늬가 있어서 그것이 우러나와 인간의 무늬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얼이 따로 있고 자연의 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삶숨(生命)의 얼’이 있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것을 ‘삶이요 숨으로 이어지는 자연 해석학’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텍스트(text)는 늘 자연과 함께-해온 텍스트(con-text)입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삶의 텍스트와 콘텍스트는 서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삶숨은 텍스트이자 동시에 콘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땅이 하늘 향해 올리는 기도(祈禱)요 찬송(讚頌)이다. 하늘에서 내린 것에 제 마음을 넣어서 돌린 것이 숲이요 꽃이다...... 머리 위의 저 푸른 하늘은 우리 정신의 숲이다”, “자연이...... 우리 정신교육의 교과서도 된다”라는 표현들은 그가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함석헌에 따르면, “세계는 생명을 죽이기 때문에 더럽다”고 했습니다. 이 세계의 생명 죽임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혁명’입니다. 그런데 그 혁명이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에 대한 해석, 자연에 대한 해석, 세계에 대한 명료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가다머(H.-G. Gadamer, 1900-2002)나 그롱댕(J. Grondin)은 ‘해석학적 보편성’을 인간의 ‘내적 언어’(im verbum interius)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함석헌에게 있어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는 그것, 언어를 통해서 끊임없이 진술되어야 하는 이 세계를 해석학적 언어로 담아낸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삶숨, 얼, 정신, 씨알, 비폭력, 저항, 혁명 등. 이미 함석헌은 이런 혜안을 갖고 있었습니다. “혁명은 해석에서부터 시작이다. 이 우주는 뜻의 우주이므로 중요한 것이 해석이다”, “혁명은 뒤집어엎음이다”, 또한 간디의 말을 인용하면서, “혁명이란 맨 첨 원리에 돌아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자연은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해 혁명을 원합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었던 체제를 뒤엎고 온 우주와 인간 더불어 살던 맨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텍스트를 발생시킨 콘텍스트를 고쳐서 새로운 자연이라는 텍스트를 쓰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소위 ‘생태 혁명’, ‘우주 혁명’, ‘환경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저항할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또 한 가지의 방법은 ‘저항’입니다. 함석헌이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길은 끊임없는 반항의 길이다”라고 말한 것은, 삶숨의 보편성을 저항으로, 삶숨의 본질을 자기주장[자기줏대]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삶숨이 있는 모든 것들을 해하는 행위에 대해 저항하는 것, 그 저항이야말로 ‘삶숨이 있는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생명적인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이유는 “생명 그 자체가 규정이요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반생명적, 반생태적인 세계에서 씨알이 해야 하는 저항의 몸짓과 저항의 언어는 무엇일까요? 역설적이게도 ‘삶이 숨이 되도록 하는 삶숨’입니다. “내가 뭐냐? 끝없이 나감이 나요, 자기를 함이 나요, 삶이 곧 나다. 내 이름이 뭐냐? 길이 내 이름이요, 참이 내 이름이요, 생명이 내 이름이지. 구원이 뭐냐? 이름을 얻음이다. 이름이 어디 있느냐? 이름은 천지에 하나뿐이다. 내 몸에 붙인 이름을 버리고 ‘그 이름’을 받을 때 나는 영원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자연을 무엇으로 명명할까요? ‘삶숨’입니다. 자연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고 그 깨우침을 통해 제 생명을 살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행태에 대해서 반항하고, 생태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씨의 이름값을 하는 것이요, 자연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삶숨이자 그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을 위해서 “삶숨은 힘을 쓰고, 애를 쓰고, 기를 쓰고, 얼을 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맹목적 의지는 ”삶숨“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원리는 자(自)이다”, “그저 자연이다”, “제대로 그런 것이다.” 함석헌의 말을 빌린다면, 사랑이 꿈틀거리는 자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씨알 안에 사랑이 꿈틀거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저 자연이자, 제대로 그러한 것의 참 삶숨이 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함석헌은, “창조하는 힘은 씨알에게만 있다”라고 했습니다. 씨알은 하나의 ‘삶숨 물둥지’에서 새로운 자연을 창조하는 콘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서 자연은 참 삶숨을 지닌 새로운 텍스트가 되어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김대식, 내일 계속됩니다.)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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