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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환경

[제3강] 우주의 씨알을 체험해야 한다.

by anarchopists 2020. 2.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04 10:41]에 발행한 글입니다.



환경문제와 새로운 인간학

우주의 씨알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람다움을 깨달아야  한다.


함석헌은 깨달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 깨달아야 믿음이다. 못 깨달으면 미신이요, 기적이요, 깨달으면 정신(正信)이요, 권능이다. 무엇을 깨닫는다는 말인가. 나를 깨닫는다는 말이다. 역사를 깨닫는다는 말이다. 역사의 책임을 지는 나요, 나의 실현된 것이 역사임을 깨달아야 믿음이다. 그 믿음을 가져야 인격이요, 국민이요, 문화의 창조자이다.”

이러한 함석헌의 사상을 보면,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M. Eckhart, 1260-1327?)와 그의 사상을 잘 풀이한 매튜 폭스(M. Fox)가 말한 의식과 정신의 ‘깨어남’과 매우 흡사합니다. 역사의 나를 깨달음, 그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기 존재를 깨닫는 것이 인간 현존재를 인격이라 한 함석헌의 사상은 우주 전체 속에서 자신을 깨닫고 모든 생명들과 함께 생명을 깨치고 살아가는 인간의 자리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고유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답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생명 일반은 생명으로서 있을 자격, 생명-다움으로 살아갈 우주 안에서의 위치가 있습니다. 필자는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환경인격, 생명인격, 생태인격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운동, 생명운동을 전개하면서 정책을 입안하여 반생태적 정부나 반생명적 사회와 맞서는 사람 역시 ‘사람다움’(人格), ‘사람의 품격’, ‘사람-됨됨이’가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다움’을 기본으로 여기며 모든 생명에 대해서도 ‘생명-다움’으로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다움’이 인간,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져야 할 예(禮)로서의 꾸밈(格式)이라면, ‘생명다움’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 사이의 보편적, 형식적 격식입니다. 이 말은 자연 자체가 인격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도덕적 고려의 대상 혹은 존재(ens)라는 점에서 그 격(格)을 상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비소유의 존재(ens)로 인식하는 씨알인간학은 모든 생명들 안에 신과 우주의 정신을 머금고 끊임없이 생성하고자 하는 능력(의지)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 안에 ‘씨알이-있음’으로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민초가 씨이듯이, 백성 안에 씨이 있듯이, 우주 안에 씨이 있음을 알고 우주의 씨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것을 “나무가 땅에서 난 것이면 생명은 우주에서 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우주의 생명을 신에 빗대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이 있다면 산에 있고, 바다에 있고, 풀과 꽃과 벌레에 있고, 햇빛과 구름과 바람에 있다. 자연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산색개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계성편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舌)-바위 빼나고 숲 우거진 봉우리 그대로가 하나님의 몸이요, 고함치다, 속삭이다, 노래하다 하는 시냇물 소리 그대로가 하나님의 음성이다. 자연은 벌레처럼 파먹기나 할 미끼가 아니요, 깊은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요, 간절한 위로를 주는 친구다.”

씨알의 소리는
우주 속 알맹이에서 나오는 고남의 외침이다.

자연을 신의 몸과 음성으로 혹은 스승과 친구로 표현하고 있는 함석헌의 생태적 사유는 앞서 말한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많이 닮았습니다. 만물 안에서 신을 볼 줄 알았던 엑카르트의 속 알맹이와 자연 안에서 씨알이-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던 함석헌의 속 알맹이는 일맥상통합니다. 그들은 자연 안에 우주의 씨알이-있음을 깨우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었던 씨알의 소리는 백성, 즉 사람에게만 있지 않습니다.

씨알의 소리는 사람의 소리만 아니라 우주의 속 알맹이에서 나오는 고통과 고난의 외침입니다. 우리는 지금 저 속 깊은 곳에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자연의 소리를, 자신이 지닌 씨알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말하고 있는 존재론적 외침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씨알의 속 알맹이와 우주의 속 알맹이가 만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인’(仁)한 사람임을 믿어야 한다...... ‘인’은 알맹이다. 그것이 곧 생명이다. 하나님의 명이다. 없어질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착함’이다.”

원래 ‘인격’을 의미하는 영어의 ‘personality’는 라틴어의 ‘persona’에서 왔는데, 그 어원을 좀 더 파헤쳐보면 ‘소리의 울림’을 뜻하는 ‘per sonare’에서 파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착함, 그것은 소리의 울림, 즉 자연이 우리에게 뚱겨주는 소리, 아픔의 소리, 우주의 서로-울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속 알맹이입니다. 그 속 알맹이가 인격이요, 인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 알맹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착함’의 본질입니다.

‘격’(格)이라는 한자어는 ‘나무의 가지가 이르러 닿다’와 ‘쑥 내밀다’라는 속뜻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생명을 바로 잡기(格) 위해서 진정한 생태적 휴머니즘이 필요합니다. 그 생태적 휴머니즘은 자신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씨알의 정신을 가다듬으며 자신을 깨닫는 인격자에 기반을 두는 것입니다.

각자(覺者)의 삶은 비단 자신이 ‘정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이 거대한 씨알의 생명을 배태하고 있음을 알고 자연에게 손을 내밀어 같은 생명으로 맞닿아 한올지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씨알이 “제 생각”을 가지고 갈가위 같은 죽임의 문화꾼을 극복하고 환경인격을 가진 살림의 문화꾼으로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다음에 계속됩니다.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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