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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환경

[김대식-제4강] 생명은 거룩하다.

by anarchopists 2020. 2. 3.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2/05 09:00]에 발행한 글입니다.

[김대식의 함석헌 사상과 생태-4]

함석헌의 사상을 생태적으로 읽기
『인간혁명의 철학』을 중심으로

환경문제와 생철학으로서의 맑은 정신_“생명은 거룩한 것이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생명은 자람이요, 피어남이요, 낳음이요, 만듦이요, 지어냄이요, 이루잠”입니다. 또한 ‘생명은 피어나고 터지고 달려가고 뛰어가는 늘 새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생명을 긴장이라고 말합니다. “삶은 한 개 켱김[緊張]이다.” 그런 뜻에서 보면, 삶은 명사적 동사입니다. 삶 혹은 생명이란 정지한 듯하고 고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멈추지 않고 영원히 운동하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팽팽한 우주의 긴장을 ‘생명의 알-짬’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생명의 실이 엉키지 않고 삶과 죽음, 전체와 나, 공(公)과 사(私)를 초월하는 거룩함이 필요합니다. 거룩함은 삶도 있고 죽음도 있으며, 전체도 있고 나도 있으며, 공도 있고 사도 있다는 삶의 초월성입니다. 그렇게 할 때 마치 삶의 양끝에 있는 것들의 생명실이 엉키지 않고 우주라는 ‘생명꾸러미’ 안에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共存在/더불어-있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삶은 곧[直, 貞]이다”, ‘삶은 가운데(中), 바름이다’, “삶은 되풀이 인듯하면서도 늘 새롭고, 한없이 많은듯하면서도 하나다”라고 말한 함석헌의 생철학적 표현에서 잘 드러난 바와 같이, 히브리 성서(구약성서) 「레위기」에 나타난 ‘거룩함’(kadosh, 레위 11,45; 20,7-8 참조)과도 잘 어울립니다. 비록 거룩함이 ‘구별’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무엇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엉키지 않음, 섞이지 않음, 올곧음, 올바름, 완전함, 깨끗함(맑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삶은 새로움이고 하나[큼, 불변, 통일, 가득함, 바름 등]입니다. 그것은 또한 자유함입니다. 함석헌은 이를 두고 “생명은 스스로 끊임없이 피어나고 지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늘 어디 가든지 막아냄, 건드림, 잡아당김을 느낀다. 그것을 이기고 제대로 하는 것, 자유하는 것이 생명이다. 새롭다는 것은 자유하는 힘을 가졌다는 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거룩하다는 것 혹은 생명이 거룩하기 위한 조건은 제 생명을 생명이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 제 생명을 살아낼 수 있도록 삶과 죽음, 전체와 나의 생명 잔치에서 소외시키지 않는 스스로 그러함(自然/自由)입니다.

생명의 역사의 바퀴는 구른다.

생명이 ‘거룩하다는 것’은 ‘맑은 것’입니다. 이 맑은 것은, 함석헌의 논리에 따르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서, 그것을 통해서 만물이 온전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른바 ‘옹근 생명’입니다. 거룩한 것, 혹은 맑은 생명은 ‘흠이 아니 간 것’, ‘이지러짐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옹근 생명’은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은 아무도 손을 댈 수 없고, 마음을 거기 붙일 수 없고, 비평을 할 수 없고,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이 거룩한 옹근 생명(holy)을 통해서 만물(wholly)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생명인 자연을 아무도 손댈 수 없습니다(자연의 폭력화에 대한 저항), 아무도 마음을 거기 붙일 수 없습니다(자연의 소유화에 대한 저항), 아무도 비평을 할 수 없습니다(자연의 무정신화無精神化에 대한 저항), 아무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자연의 수단화와 착취화에 대한 저항).


이제 우리는 함석헌의 표현대로, “삶이 스스로 새로워지는 삶이라면 삶의 길이란 스스로 새로워지는 생명의 불도가니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늘 정신을 새롭게 하는 일 뿐입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정신은 아무것도 섞인 것이 없이 맑아야” 합니다. 맑은 것이 거룩한 것이라 했으니, ‘옹근 생명’을 거룩한 것으로 마주 대하자면 정신을 맑게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신 속에 들어 온 외물(外物), 즉 ‘욕심’을 덜어내는 일이 시급합니다.

맑은 정신 스스로 삶을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 맑은 정신 속에 하고자 하는 인위人爲적인 마음, 즉 불순물인 욕심으로 채워둔다면 자연은 하고자 하는 그 인위에 지배되어 버리기 때문에 거룩한 ‘옹근 생명’이라는 인식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맑은 정신으로 자연을 바라봐야 ‘옹근 생명’이 자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 없이 생명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옹근 생명’을 속 깊이 생각하고 우리의 삶을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는 절대와 상대를 다 살려야 합니다. 절대와 상대가 따로 떨어져서 절대만이 거룩하다고 치우친[얕은] 생각을 한다면, 삶은 쪼개지고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삶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삶, 즉 생(生)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함석헌의 생명역사관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낡아가는 세계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영원을 드러내고,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지만 시시각각으로 그 세계에 사랑의 손을 대기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이다. 이리하여 영원히 새로워지는 생명의 역사 바퀴는 구른다.”
이제 생명세계 안에서 신의 영원을 드러내고, 세계의 거룩함을 알리는 것은 씨알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맑은 정신을 지닌 생각지기 씨알[民]들이 이러한 생명의 역사 바퀴를 굴리는 데 일조해야 하지 않을까요?(김대식, 내일 계속됩니다.)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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