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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함석헌, 철학\함석헌, 영성

함석헌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자

by anarchopists 2020. 1.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09/06/15 15:2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을 말한다-김대식]


함석헌을 현대적으로 해석한다.

함석헌이 기억-됨의 신학을 위하여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감성적인) 젊은이들에게 근대적인 정치적, 이념적 언어들이 의미가 있을까요?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청년 함석헌의 언어들을 어떻게 개발, 해석할 것인가가 향후 함석헌의 기억-됨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학이 언어를 담아내는 해석학적 장치와 시대를 읽어 내는 안목이 매우 뒤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학은 이제 정치, 이념, 종교 등 거대담론에서 벗어나서(포기하고?) 실천적, 실습적 목회로 전향하였고, 언어 또한 이미 실용적인 언어(수사학적인 언어)로 변한 지 오래입니다.

함석헌이 예수를 ‘산숨’이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예수를 산숨, 혹은 삶-숨[생명]으로 여겨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를 죽은 숨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교회 공동체의 언어의 죽음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언어들이 오늘날 교회의 실천적 힘이 되기 위해서는 환경, 여성, 영성, 교육, 인권, 폭력, (다)문화, 예술(미학, 언젠가 함석헌은 진선미가 어우러진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한 바 있다) 등이 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지는 신학적 해석들이 필요합니다.

함석헌의 언어 놀이는 그의 사상을 드러내는 데에 매우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어란 모름지기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라고 볼 때, 함석헌의 사상을 지금과 아직 오직 않음의 그 때에도(미래) 기억-되기 위해서 그의 언어 놀이에 대한 종교적 해석학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특히 함석헌의 언어들이 박제화되지 않도록 현대적 감각에 맞는 신학적 언어, 해석학적 언어의 개발은 갈수록 가벼워지는 담론에 대해 무게감을 더해 주기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스힐레벡스(E. Schillebeeckx)가 말한 것처럼, 신앙의 언어가 게토화된 언어가 아니라 삶의 형식과 사회적 실재를 드러내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도 통하는 말입니다.

함석헌이 비판하고 있듯이, 작금의 신학적 언어가 너무 번역신학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언어가 과연 민중을 깨우치는 언어가 되었습니까? 자칫 신앙의 언어가 교리의 언어, 주체가 객체에게 가르치는 언어가 되어 버릴 수 있는 지배적인 언어가 될 수 있기 까닭에 씨알의 언어는 평등의 언어이어야 하고, 또한 열린 대화의 언어이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이며,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씨알이 진리를 통해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 시대의 정신을 함양하고 타자와 관계 맺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길일 것입니다.

해석학은 exegesis와 eisegesis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현재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위한 해석학적 작업은 exegesis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현대적 해석을 위한 창조적 작업은 eisegesis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함석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석헌을 넘어섬, 넘나-듦(trans)의 신학이 필요합니다. 함석헌이 당시의 새로운 정신, 새로운 종교를 염원했던 노력들의 일환으로 옛글을 풀이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씨알을 계도할 힘을 상실한 정신세계와 종교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가치체계 혹은 정신세계를 창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함석헌이 계속 기억-되기 위해서는 함석헌의 언어들을 새롭게 해석해야만 합니다.

함석헌이 기억-됨, 그리고 종교-임과 종교-됨

함석헌에 의하면 종교는 늘 변화하는 생명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특정종교도 진리를 독점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높은 진리를 향해 함께 매진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진리를 탐구하는 공동체로서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적 배타성과 교만한 판단을 괄호치고 오히려 역사의 현장에 투신자로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관념의 종교가 아닌 ‘길거리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함석헌은 종교-함(being the religious)뿐만 아니라 종교-됨(becoming the religious)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특정)종교가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종교적 삶이냐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종교의 본질(being)이 완성될 수 있느냐보다 종교가 되어-감(becoming)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는 진화론적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현재 종교는 완성으로서의 종교 혹은 타종교보다 온전한 종교집단으로 단정 짓고 종교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건강하려면 종교 그 자체의 성격을 끊임없이 묻고 성찰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종교-되어감의 자세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종교(교회)는 앞으로도 씨알에게, 민중에게 기억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기억상실증에 걸린 종교나 불리할 때마다 여전히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것입니까? 기억은 종교 공동체 내에서 생성하기도 하지만, 바깥의 씨알들에게 기억-됨으로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무엇을 기억되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곧 종교 공동체 내에서 무슨 기억을 발전시키며 무엇을 스스로 기억으로 남길 것인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치 함석헌을 추종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정신을 쇄신함으로서 함석헌의 말마디나 암송하는 함석헌 도그마티스트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종교 공동체도 예수의 말씀이나 암송하며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양 으스대는 모습은 예수 도그마티스트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1세기 이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서 예수에 대한 기억은 도그마에 있지 않았습니다. 역동적인 삶,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그를 역사적으로 숨 쉬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1세기 예수 운동을 전개했던 이들이 간직했던 예수상이 그랬듯이, 오늘날의 예수도 기억-됨과 기억-함(삶)으로 현존시켜야 할 인물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김 진이 “오늘 우리는 함석헌 선생님을 만나고 있는가?”하고 현재형으로 물었듯이, 논자는 이렇게 고쳐 묻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함석헌 선생님은 기억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일도 함석헌 선생님은 후손들에게 기억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그를 기억하기 위한 지속적인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서, 함석헌이 자신을 가리켜 ‘알바트로스’라고 말했듯이,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새로 만들 수 있느냐 혹은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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