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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한국 종교를 개혁하자

by anarchopists 2020. 1.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2/20 08:17]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를 탈구축하자!

다 아는 바와 같이 요즈음 한국불교 종단 중 하나인 조계종의 행보가 심상치 않습니다. 부산의 범어사 방화사건 또한 개신교의 일부 광신도가 저질렀다하니 종교와 종교 사이, 종교와 국가 사이의 ‘사이[間, 閒] 감정’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수장이 어떠한 종교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국가의 이념이나 윤리 혹은 정책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과거 서구 정치사를 보더라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장의 종교가 백성의 믿는 바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종교는 모름지기 사이 감정입니다. 종교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신앙적 감정뿐만 아니라 윤리적 감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사이’[間]는 ‘관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 관계 속에 신의 빛이 스며들어 상호주관적인 깨달음과 행위들이 거침없이 서로 넘나들 수 있어야 종교입니다.

모든 종교는 그 ‘사이’ 즉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문자화된 경전들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성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서는 바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의 관계와 처신의 때(時中)를 규정해주는 관계적 행위철학이 담겨 있는 경전입니다. 그런데 함석헌은 그 ‘성서의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나 인생의 근본 알몸인 영원한 생명을 붙잡게 하자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뿐만 아니라 대부분 고등종교의 경전도 바로 이러한 우주와 인생의 근본 이치인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탈을 새롭게 하고 그 바탈의 바탈이 되는 경전이라는 말인데,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종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단지 인간의 바탈을 새롭게 하기 보다는 물질과 세속의 권력, 그리고 명예에 영원성을 부여하면서 그 고유의 바탈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을 ‘역사에 대한 도덕적 책임자’로 봅니다. 도덕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종교가 세속적 권력에 탐닉하고 물질을 신성화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몸부림은 모세가 거룩한 하나님의 땅에 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신발을 벗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함석헌은 그 신발을 ‘인간의 헤맴’으로 규정합니다. 신이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모든 방법과 모든 길을 버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신의 영역에서는 신의 방법과 신의 길 즉 중도(中道, 한길)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러한 중도 즉 하나님의 길, 하나님에 대해서 도피하고 하나님에 대해 포기하려는 종교는 자신을 탈구성(혹은 탈구축: 해체, deconstruction)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석헌은 그것을 하나님에 대해서 정면으로 서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쇄신과 탈구축은 새로운 것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사상, 새로운 행위,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삶.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산의 고통이 뒤따라야 합니다. 지금 세워 있는 자신의 아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물을 올려야 합니다. 관계적 소통이 막혀 있는 종교의 구조물, 정신적․물리적 구조물을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야 그늘진 세계에 신의 빛이 스며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의 빛이 비추는 곳에 한 길이 보일 것이며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는 신의 빛을 가리는 모든 것들, 이를테면 이념, 권력, 물질, 욕망, 편견, 아집, 가식, 거짓 등을 제거하고 신의 스스로 움직이는 정신과 운동을 보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는 정신이기 때문에 지은 그 세계로 스스로 하는 생명에 이르기를 바란다”고 함석헌은 말합니다.

스스로 하는 정신이 자유이며 자존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자존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을 품고 있는 모든 존재자들도 스스로 생명으로 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어떠한 것에도 예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이기를 원하는 신의 생각은 종교의 온전한 ‘사이 감정’, 건전한 ‘관계적 감성’이 작용할 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격되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격한 감정으로만 대립하게 된다면 그 ‘사이’에는 어떠한 신의 빛도 스며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종교의 꼴갖춤으로는 성서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등종교 안에는 거룩한 신의 빛이 발현되듯이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종교는 탈구축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종교의 텍스트가 콘텍스트를 무시한다면 텍스트는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탈구축은 텍스트를 무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콘텍스트를 존중하면서 텍스트의 참의미를 되살리자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탈구축은 근대적 이성과 계몽을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한 정신적, 물질적 개조라는 목적에 훨씬 부합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종교의 새로운 해산(解産)이 요구되는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의 알몸’, ‘종교의 바탈’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2010/12/20,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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