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칼 마르크스와 씨알 함석헌의 휴먼-이코노믹스

by anarchopists 2020. 1. 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0/15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칼 마르크스와
씨알 함석헌의 휴먼-이코노믹스(human-economics)


근대 서양 철학사를 대강 훑어보면 칼 마르크스(K. Marx)의 철학이 칸트(I. Kant)의 인식론과도 그리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칸트의 영향을 받은 헤겔(G. W. F. Hegel)에 의해 마르크스의 철학적 골조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 명의 서양 철학자들은 인간에 대한 관심, 좀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의식과 대상(사물)에 대한 관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칸트는 중세의 형이상학적 독단으로부터 인간의 내면적 의식 혹은 이성으로 전회하였고, 헤겔은 더 나아가서 인간의 이성을 절대정신으로까지 전개시켜 나아갑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이성이란 물질적 토대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노동이라는 것도 자연이라는 감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은 물질(대상), 혹은 현실적 생활세계와의 관계성에 있는 실천적 의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그러한 현실적 생활 토대인 물질과 노동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가가 어떻게 노동자의 노동력, 상품, 시간, 잉여가치 등을 착취하는가를 날카롭게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노동은 단순히 자연을 가공한 인간의 노동력이 아니라 “정신적 노동”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칸트에 있어서 자연과 인간의 자유(이성)는 이원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헤겔에 있어서는 자연과 정신의 긴장된 갈등이 절대정신에 의해서 해소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물질과 시간, 상품, 여가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가로 인해서 정신의 외화, 혹은 정신의 소외를 겪고 있는 노동자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자본』 2판의 후기에서 마르크스 자신은 헤겔의 이념 혹은 관념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전화했다고 말하고 있듯이,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 혹은 이성은 관념의 물질화(상품의 가치나 가격은 관념적이고 상상적인 것), 노동의 정신화를 통한 실천적 의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19세기 유럽의 경제적 현실에서, 마르크스는 죽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운 경제학(『자본』)을 쓰고 싶어 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당시 마르크스는 상품의 생산능력을 가진 노동자의 노동력 즉 인격적, 육체적, 정신적 총체로서의 인간의 신체가 상품으로 판매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였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자신의 상품으로서의 노동력, 판매 가능한 노동력은 이미 자본가에 수중에 있다는 것, 양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꼬집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일시적으로, 한시적으로만 화폐 소유자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양도할 것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예나 지금이나 노동자의 노동능력은 자본가에 의해서 그 이상의 소유권까지도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물질적 토대로서의 생활세계와 정신 사이의 괴리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란 존재는 세계와 인간 자신의 창조이어야 하며 변혁하는 존재이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와 씨알 함석헌(咸錫憲) 사이의 유사성을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함석헌과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실존적인 (한계)상황에서의 인간의 삶, 인간다운 삶이었으며, 의식하고 자각하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개인, 사회, 자연과의 연관성 속에서 철학을 하고 삶을 영위한다고 할 때 그 비판적 삶은 항상 동일한 범주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총체적인 삶에 대해서, 그것이 국가이든 자본이든 이데올로기이든 인간의 삶을 지배, 억압, 착취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참다운 삶을 위해서 저항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인간이란 사회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기풍이 무너진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그 사회를 건전하게 발전시키려면 사회적 제도를 뜯어 고쳐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 그에 의하면 사회적 기풍의 혼란은 결국 자본주의로부터 나왔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먹자풍”의 자본주의 문화인데, 그것은 사회혁명이 아니고는 고칠 수 없습니다. 함석헌에 의하면 그 사회혁명의 포탄은 ‘나’라는 정신, ‘나’라는 의식, 삶 자체의 가슴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씨알의 사명은 지배하려는 모든 우상을 때려 부수어 뵈지 않는 전체가 우리 속에서 명령하게 하는 데 있다...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짧은 문장만으로 다 드러낼 수는 없지만, 함석헌의 반성적 숙고는 칸트의 의식철학, 계몽철학의 연장선일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사회 개혁론, 자본에 대한 비판론과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 할 것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 아니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세상은 물신숭배도, 또 인간의 노동력을 상품처럼 판매해야 하는 비참한 현실도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인간을 본능으로 몰고 있는, 인간 자신의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에 저항하는 인격, 초월적 이성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모든 것에 대해서 부정할 수 있는 나의 명령과 입법은 나의 자유로운 양심에 있습니다. 그 양심이 곧 타자에 의해서 의식되어진 시선이라면 지금 서 있는 나의 자리를 검열하고 성찰해봐야 할 것입니다. “인간답게 살만한 세상이 아니야”하고 말하는 불균형과 불평등의 사회가 더 심화되기 전에 말입니다.(2010.10.14/ 김대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