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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퍽퍽한 한해였다- 정신을 진화시키자.

by anarchopists 2020. 1.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2/23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을 탈구축하자!

공간과 시간이라는 것을 애초에 대상을 파악하기 위한, 또는 인식하기 위한 선험적 감성의 형식이라는 말한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I. Kant)이다. 인간이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미 공간과 시간이라는 보편타당한 형식이 주어져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다. 2010년 한 해를 정리하면서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떠한 특수한 공간과 시간이라는 형식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한국이라는 공간 혹은 세계라는 공간이 없이, 2010년이라는 시간이 없이 사건들을 파악하고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사유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미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유란 어느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그것을 기억하고 기획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찍이 하이데거의 연인이었으며 야스퍼스의 제자였던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 사유하고, 사유를 인식과 행위의 도구로 사용하기보다 이 능력을 통해 더 많은 것을 행하려는 성향과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사유하는 나는 거처를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골똘히 생각해보면 사유하는 존재인 ‘나’는 유한성을 갖고 있지만, 한편 무한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살아 있다는 것은 자신의 출현 이전에 존재하였고 자신의 소멸 이후에도 존재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그녀의 말에서처럼 ‘나’는 시공간에 한정되어 있으면서도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유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은 모호하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유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반도의 남북 상황과 국제정세는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르고 있고, 그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기만과 음모에 대해서조차도 인식하기가 녹록지 않다. 따라서 단순히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다고 해서 사유한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현상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본질과 오류들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특수한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려는 운동은 인간의 정신세계가 가지고 있는 진화의 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샤르댕의 진화론에서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내면의 세계, 혹은 인류의 미래는 내면화로 갈 수밖에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역사는 내면화 혹은 정신세계의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주가 물질적으로 한정이 된 거니까 인간이 물질적으로 발전할 여지는 없는 거고, 앞으로 인간이 만약에 발전을 한다면 이제는 ‘내적’인, 이 ‘안’으로 ‘정신’적인 데로 할 거다.” 필자는 함석헌의 이 주장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가 말하듯이, 진화는 정신적인 보람을 느끼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의 사는 원리이자 정신의 세계가 숨을 쉬는 것이라면, 현재와 미래는 그러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왜 인간과 사회는 정신적인 보람, 정신의 세계에 무게를 두는 삶에서 자꾸 탈피를 하려는 것일까? 사유하고 있는 듯하지만 오히려 사유를 통제당하고 급기야 사유를 맡기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불행하게도 나의 사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는 “사유가 거주하는 모든 곳은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기억의 자궁’에서 끌어내 기억하고 회상하고 재회상하여(아우구스티누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기대하고 기획하면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내년에는 이 “있을 곳 같지 않은 곳” 즉 “공백”, “절대적인 무”로서의 사유, 또 사유하는 존재자가 “유일한 실재로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서서히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잊어야 하는 사건들도 많지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도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 삶의 가벼움으로 치닫는 일상인(Das Mann)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렌트는 그런 우리에게 말한다. “사유는 항상 부재 상태”이다. 나는 그때 거기에 있지 않았지만, 사유하는 존재자는 늘 기억의 자궁으로부터 그것을 끄집어내어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사유는 부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 편재가 맞을 지도 모른다. 사유를 통해서 ‘나’는 부재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사유하는 인간만이 참으로 존재하게 된다. 아무리 지배와 억압, 그리고 통제 속에 놓여 있더라도 사유하는 존재에게는 정신의 세계가 숨을 쉬는 것이고, 그에 의해 참으로 사는 것이 된다.

퍽퍽한 한 해였다. 별로 웃을 일도 없었던 것 같다. 설령 수많은 일상인들이 또 물질적 풍요와 성장만을 꿈꾼다 하더라도, 내년에는 씨알들의 정신세계가 숨을 쉬며 내면이 진화하기를 빌어본다. 그뿐만 아니라 “있을 것 같지 않는 그곳”에다 마음을 두었으면 하는 억지를 써본다. 생활세계의 탈구축을 위해서(2010/12/23).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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