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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 박사 칼럼

참뜻의 예수성탄은 있는가?

by anarchopists 2020. 1. 4.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0/12/22 06:36]에 발행한 글입니다.


예수 성탄은 있는가?
성탄을 탈구축하자!

벌써 예수 성탄일이 다가왔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예수가 기원전 약 6-7년에 태어나 기원후 30년 4월 7일에 죽었다는 데에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게 짧게 살다간 예수의 인생이건만 실로 인류의 정신사에서 그만큼 영향력을 끼친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매년 이맘 때가 되면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시간을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성탄은 그가 탄생한 의미와 본래적 자리는 상실한 채 상업적 성격으로 변질되고 그저 여러 휴일 중 또 다른 하루에 불과한 날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함석헌은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을 이렇게 말한다. “참을 온 우주에 이루는 것을 그 사업을 하신 이다. 즉 우리의 정신적 완성을 목적하신 이다.” 예수는 당시 억압과 착취, 그리고 지배당하는 씨알들을 묵과하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 “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참”을 위해서 민중을 계도하던 예수의 삶을 추종한다는 현재의 기성 종교가 그 “참”을 잃어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참”은 진실함, 정직함, 어긋나지 않음 등으로 볼 수 있는데, 함석헌은 이것을 “떳떳한 것(常)이 늘 있는 것(恒)이요, 그러기 때문에 올바른 것(正)이요, 또 그러기 때문에 참(眞)”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참”이란 절대적인 것 혹은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오늘날 종교는 이러한 성격을 담지하고 있는 “참”맛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오심에 대한 시원을 끊임없이 캐지 않고 상대적인 세계, 가변적인 것에 정신이 혼미해져 있는 오늘날 종교의 모습은 예수의 “참”과는 거리가 멀지 않는가.

그 “참”은 1세기 예수에 의해 드러난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유다인 및 로마, 그리스인들의 정신적 완성의 길을 열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와 세계는 그러한 정신적 완성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은 “인생은 재미있는 것을 누리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전해줄 뜻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인생은 주저앉을 것이 아니요 달려 나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한 것은 이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바로 예수의 오신 목적 즉 “참”의 상실과 “뜻”의 망각이다. 한국교회의 실존적 기반은 “참뜻”에 있다는 말이다. “참뜻”을 말하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이번 성탄절에 해야 할 일이다. 다시 말해서 ‘참과 뜻’으로 예수 성탄을 탈구축하는 것이다. 참과 뜻은 채우기 위해 비워야 할 것과 뜻을 전하기 위해서 편협한 사유를 뜯어 고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함석헌은 “조그만 소유는 다투어 가짐으로 될 수 있으나 무한의 소유는 넘겨줌으로 된다. 잠깐 동안의 세력은 꼭 붙잡음으로 할 수 있으나 영원한 세력은 전해줌으로 한다”고 말함으로써 권력과 소유를 해체하고 이 세계의 해방을 위해 오신 예수를 조명한다. 1세기의 예수는 그것을 벗어나고 탈출하자고 말하면서 순례자가 되었건만, 지금 교회는 권력과 소유라는 기득권을 가지고 “참”과 “뜻”을 전하는 데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주장대로, “철학은 적어도 기만당하지 말 것을 가르쳐” 준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철학적 사유를 통한 온갖 기만성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벗어나서 자기의 본래적 자리에 복귀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만 성탄도 의미가 있을 것이며, 정신, 정신, 또 정신의 완성에 기여하는 그리스도교가 될 수 있지 않는가. 야스퍼스(Karl Jaspers)에 의하면, “인간은 구조, 구원, 해방, 자기 자신에로의 복귀를 필요”로 한다. 동시에 “철학적 사색에 있어서 인간은 제정신이 들”어야 한다. 자신의 내적 성장과 정신의 성숙에로의 여정이 아니라 외부의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본질과 절대성이 무너진다면 종교는 인간의 삶을 훌륭하게 구성(construction)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기만은 당하지 말아야 한다. 기만을 넘어갈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성탄은 기만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de, 脫)이며, 새로운 삶의 뜻, 종교의 뜻, 참뜻을 이 땅에 구축/구성하는 전례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초월자로의 진로가 잡히지 않았다면, 인간은 아직도 본래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야스퍼스의 말은 결국 인간의 불안정을 영원한 안정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성탄의 의미는 종래의 구조물을 불안하게 하고, 그 불안을 감싸 안으면서 새로운 삶과 신앙, 그리고 뜻의 실천을 가져올 수 있는 영원한 구조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저 교회당의 높은 돌담을 헐고 거기 앉은 잔나비를 끌어 내리라!”고 말한다. 예수 성탄은 영원한 안정, 평화, 구원, 해방을 위해서 지금 이곳의 뜻버린 존재, 참의 건망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더 불안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그 기만적인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참뜻과 참맛으로 살게 하자는 데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2010/12/22, 김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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