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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한국의 종교들, 타락해서 더 이상 타락할 게 없나?

by anarchopists 2019. 11. 28.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2/11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종교의 탈선, 어디까지 갈 것인가?

“간디를 옆에서 바로 안 사람은 “간디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그 사람은 타고난 그리스도인(Natural Christian)이다”했어요. 스탠리 존스 목사가 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하기를, 예수님의 뜻대로 비교적 충실하게 해서 훌륭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여준 이가 간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제 그런 점의 높은 차원을 알아서, 여기서 실지 내 살림에 사랑과 참을 실천해보려 해도 물론 잘못되는 거 많이 있지요.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포기하고 하나님이 용서하는 데 무조건 의지하는 것 그건 하나님 뜻을 모르는 거지요. 그런고로 나는 우리 그리스도교가 정신력이 이렇게 박약하게 되었다고 그래요. 사람이 가다가 실패를 하고 고민하는 면이 있더라도 힘껏 내가 내 몸에서 실현해보려고 노력을 할 때, 잘못을 했더라도 어느 무슨 빛을 보는 것이 있지, 그런 것 없이 그저 예수님 충실히 믿고, 돈은 쓰다 남은 거 있으니 충실히 연보는 내고 하면 하늘나라에 저금통장이 있는 셈이니까, 하늘나라에 문제없이 가겠지 하는 것은 안일한 종교지, 그렇게 될 수가 있어요? 그래 너무 쉽게 됐던 안일한 길을 걸으려고 했기 때문에 잘못된 게 아닌가 그럽니다
”(함석헌전집 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226쪽).

자신의 종교가 귀하다고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최근에 불교가 설립한 한 대학에서 일어난 선교행위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일방적 선교에 지나지 않는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남의 마당에 들어와서 마치 자신의 마당인 양 떠벌리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으며, 불교가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따라 설립한 학교에 들어와서 목탁을 두드린다면 그 기분이 어찌 좋을 리가 있겠는가.

배려나 관용은 인간의 이성 사회가 대두된 이래로 인류가 갖추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덕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이러한 배려나 관용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한국 종교학계의 원로 학자인 정진홍 교수는 종교 공동체가 갖는 고유한 종교적 감동의 확산이 배타성과 갈등의 근원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신을 만난 특별한 경험과 감동을 공유한 공동체가 서로 모여서 그 감동을 나누다가 점차 외부로 그 감동을 확산시키는 전략적 조직과 제도를 갖추면서 이웃종교와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 갈등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감동은 소중하게 여기면서 이웃의 감동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의(우리 공동체의) 감동을 진정한 감동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종교를 창시한 시조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감동 따로 가르침 따로가 아니라 감동을 가르침대로 힘껏 자신의 몸으로 실현하고 구현해 보려고 하는 것이 그게 (모태신앙과는 다른) ‘타고난 신앙인’의 모습이다.

만들어진 신앙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뼛속까지 신앙인이요,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태생적 신앙인의 본모습, 즉 자신의 종교가 갖고 있는 높은 뜻을 온몸으로 살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산다고 하는 것은 여기서 사는 것이지, 어디 초월적 공간을 상정하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을 욕심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함석헌이 말하는 안일한 종교적 태도이자 일생을 살아가면서 위안을 삼고자 하는 이기적 신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감동을 사는 종교, 감동의 살림에 초점을 맞추는 종교인이 정작 자신만 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살림의 종교인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항상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요, 배려하면서 사는 것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감동의 확산과 신앙 정서의 공유가 있다. 더군다나 종교라는 것은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에서 싸움이나 하고 영역 다툼이나 하는 전쟁의 종교로 밖에 달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종단이 다른 종립학교에 들어가서 선교 혹은 포교활동을 한다는 것은 ‘나는 내가 믿는 종교로 인해서 행복하고 감동이 있는데, 나 아닌 다른 이웃에게도 확산시켜야 하겠다’는 애정 어린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웃 종교 안에도 그와 동일한 행복감과 감동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웃 종교인 중에도 태생적 불교인, 자연적 무교인, 본래적인 무슬림 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 안에도 그들 종교로 인해서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 종교적 감동과 감정이 만나서 교류할 수 있고, 나의 종교와 이웃 종교가 만나서 더 풍요로는 행복감과 감동을 나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총량으로서의 행복과 건전한 정서가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고사하고, 서울 양천구의 한 교회 목사는 32억을 횡령했다고 해서 법정 구속에 징역까지 살게 되었다. 이 무슨 해괴하고 창피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종교가 설자리는 청빈의 자리라는 사실은 교회 역사 이래로 줄곧 강조되어온 바가 아니던가. 그런데 교회의 성직자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청빈의 영성적 삶을 바닥으로 추락시키고 수많은 교회를 향해 시민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가중시키는 이유는 도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져보고 해답을 구하려고 애써보지만 이미 탈선한 종교는 시민들에게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교회는 스스로 고독과 침묵을 수행하며 물질의 삶이 아니라 잠잠히 초월을 향한 몸짓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종교는 한갓 돈이나 정치권력에 맞들인 전략적 ‘장치’로 인식될 것이다.

조르주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논리를 빌리자면, 이 시대의 종교는 자신의 종교적 장치, 즉 권력, 경제, 경영, 전략 등을 타파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장치(dispositif; dispositio; disponere)는 통치, 제어, 사유, 제도, 실천, 앎, 지도, 규정, 주조 등의 총체를 나타내는 뜻을 내포하는데, 푸코(M. Foucault)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언어, 글쓰기, 철학, 담배, 농업, 인터넷 서핑, 컴퓨터, 휴대전화 등이 권력과 접속되어 있다고 보았다(Giorgio Agamben,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 양창렬, 도서출판 난장, 2010, 15-31쪽). 이러한 종교적 장치 혹은 정치, 경제, 경영 등과 유착된 권력의 형태를 간파한 함석헌은 한 성서구절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를 주라. 이 세상을 파는 것은 이 세상을 내버리는 일이다. 거기 대한 애착을 버리고 그것을 우리 살 곳으로 알지 않은 일이다...... 세상 내버린 대신으로 값이 들어온다. 그것은 정신적 값이다...... 정신적으로 만족을 느껴 스스로 덕을 자기 몸에 돌릴 때, 재산은 없어진 듯하면서 전보다 더 무서운 부자가 된다...... 그것도 버리라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자, 도덕적으로 제 살림을 못하는 자, 그 사람에게 다 내 받은 정신적 보수를 나눠주라는 말이다...... 물질이 하나도 없는 것만을 가지고는 참 무일물(無一物)이라 할 수가 없고, 정신적으로까지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진 담에 비로소 무일물이다”(함석헌전집 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1985, 260-261쪽).

난도질을 당하여서 가리사니를 잡을 수 없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가난해진다 하더라도 세상에 다 퍼줄 수 있는 종교를 기대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물질적인 나눔(가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나눔(가난)을 통해서 마음까지도 가난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 Eckhart),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co), 이세종, 이현필, 법정 스님과 같은 영성을 내 안에서 싹 틔워낼 수는 없는 것일까? 종교가 세상조차 버리고 싶어도 이제는 더 이상 버릴 게 없을 만큼 가난해진다면, 종교는 맑고 순수한 정신과 영으로 다시 한 번 사회를 계도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영적으로 우월하거나 정신적으로 탁월하기 때문에 종교 혹은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종교는 버릴 수 없는 것도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또 버릴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본래의 깔밋한 맛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성탄절의 의미는 신이 인간이 되어 낮고 천한 이 땅에 인간의 구원을 위해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지극한 겸손과 신의 자기 비움이 성탄의 신비라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독선과 아집, 그리고 이웃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투적으로 벌이는 선교에 대한 욕심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이 종교 공동체를 통해서 사적, 물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종교적 실존으로서 저지르는 수치스러운 실수도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존재의 빛을 떠올리는 시간의 언저리에서, 이 사회에 물적, 정신적 비움까지도 친히 보여준 각 종교의 종교적 창시자를 조용히 묵상해 볼 일이다.
끼리에 엘레이손!(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2011. 12. 10,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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