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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자본주의적 내세 종교를 탈피하고 현재적 행복을 누리십시오!

by anarchopists 2019. 11.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2/02 05: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의 자본주의적 종교 비판과 무교(巫敎)의 행복론



 

요즈음 TV에서 방영 중에 있는 가상 사극 드라마의 재미가 쏠쏠하다. 필자는 마치 정치와 종교가 묘하게 뒤섞인 모습으로 전개되는 듯하여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그 사극 전면에 특정종교가 등장하는데, 조선시대 통치이념인 유교에 맥도 못 추고 민중들 사이에서만 간간이 맥을 이어왔던 우리의 전통 신앙인 ‘무교’가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강신무나 세습무, 혹은 무당(남자는 박수)이 단골들과 함께 한바탕 어우러져 굿판을 벌이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 부적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소생(resuscitation)하여 과거에 연분이 있었던 왕을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주는 역할이 매우 흥미롭다. 필자는 무교(학계에서는 무속, 무 등으로 혼용하기도 한다)에 대한 단면이기는 하나, 작가가 무교의 본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교, 혹은 무속신앙은 바로 한자에서 드러나듯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신과 인간을 중재하고 인간들의 삶을 조화롭게 만들어주는 것이다(巫). 대부분의 고등종교들은 죽은 이후의 내세에 대한 뿌리 깊은 신앙들을 전수하고 현세에서의 삶을 보상받거나 징벌을 받는다는 이분법적인 종말론이 대세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죽고 난 후에 어떻게 하면 좋은 세상에 갈 것인가 하는 데에 더 비중을 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와는 달리 무교는 죽은 이들의 원혼을 불러내어 그들의 한을 달래주는 것조차도 망자를 위한 굿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유동식 교수는 “굿이란 행복을 비는 말이었다. 실제로 한국의 각종 굿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행복과 행운을 비는 재수굿, 안택굿, 천신굿 등이다. 이런 축복제(祝福祭)들은 춘추(春秋)로 제신령에게 식재초복(息災招福)을 축원하는 것이다.”(유동식,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연세대학교출판부, 1992, 296쪽)라고 말한다. 그래서 무당을 현대적인 용어로 달리 표현한다면 상담가, 혹은 카운슬러라고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은 산자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읽어주고 다독여주는 사람들이기에 말이다.


  무교만이 인간의 행복과 행운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교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종교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종교 자체 혹은 ‘교회당’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의 행복을 담보로 교회당은 부(富)로 인한 행복지수(?)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교가 반드시 현세의 인간을 위한 행복의 종교라고만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무교에서도 망자의 원혼을 잘 풀어주어서 저 세상으로 보내주는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현재 산자와 망자와의 화해를 위해서 굿을 통한 한풀이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앞서 말한 것처럼 무교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의 행복에 보다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현세의 축복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내세에 대한 복, 영원한 삶에 대한 비중이 크다는 것을 감안할 때 산자를 위한 종교라고 감히 말하기에는 어려울 듯하다. 굳이 밝힌다면 죽고 난 이후의 사람들을 위한 종교라고 한다면 억지일까? 함석헌은 이렇게 내세를 강조하는 종교를 낡은 종교라고 비판한다. 그는 현 시대의 종교가 낡은 종교가 되어 가는 현상을 조목조목 제시하는데, 그 중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있다.

“종교는 본래 현실에서 출발한다. 모든 위대한 종교가는 다 사회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인간이 고생을 하는 때에 그것을 해결해주려고 나선 이들이다. 산 종교는 결코 문제를 눌러버리거나 미래로 밀어버리거나 하지 않는다... 특권 계급으로서의 종교가는 교세를 유지해갈 필요에서 문제의 중심을 점점 더 현실에서 옮겨 피안화함으로써 충돌을 면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그 때문에 문제는 저 세상에 가서야 풀린다는 것을 강조한다. 천당 지옥 소리만이 높은 것은 그 종교가 실인간에게 차차 매력을 잃는 증거다.”(함석헌저작집14, 새 시대의 종교, 한길사, 2009, 51쪽)

  종교가 인간의 현재적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외면당하고 만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물질적 행복이 아니라, 세계와 사회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현재적 관심과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종교의 모습이다. 자신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 신자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종교,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는 돈이 신자들의 피땀 흘린 노동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종교 지도자는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종교가 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무지할 수밖에 없다. 아니 아예 안중에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것은 예수가 누누이 강조하였음에도 신자들에게는 내세만 강조하고 있으니 사회적 책임과 사회적 행복은 뒷전이 되는 게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그렇게 종교가 속해 있는 사회 공동체의 행복과는 별개로 수사학적인 협박이나 위협, 공포나 위기를 조장하여 현재적 행복을 저버리게 만드는 종교 지도자에게 과연 신학이나 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임어당 같은 사람은 인간의 영원한 삶을 담보로 해서 자행되는 종교의 행태를 보고서 종교의 가치를 의심한 것이다.

“현대 미국 영어 중의 그릇된 표현은 사람들이 ‘종교를 얻는다’(get religion) 또는 ‘종교를 판다’(sell religion)고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교회들이 종교를 손가방에 넣어가지고 팔려 하고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 가방은 탄탄하고 간단해서 가지고 다니기에 더욱 편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종교를 획득하는 가장 편안하고도 쉬운 방법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종류의 종교적 가치를 의심한다. 나는 어려운 방법으로 종교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필요한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다른 어떤 방법이 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란 전체적으로 말할 때 경이적인 하늘에 대한 개인적인 대결이며, 그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적인 성장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주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임어당, 김학주 옮김, 동서양의 사상과 종교를 찾아서, 명문당, 1998, 6쪽)

함석헌도 현대의 종교가 자본주의적 종교라고 비판한다. “현대교회 중에 자본주의적인 생활 속에 있지 않는 교회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 살면서 덮어놓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으로 믿는다. 자기네 손에 들어오는 수입이 과연 사회정의에 합한 과정을 밟아오는 것인가 아닌가는 생각하려 하지도 않고 그저 은혜라고만 한다. 그러나 성단 위에 놓이는 돈은 피가 묻은 돈들이다. 굉장한 교회당은 사실 엄정하게 맘몬이 세운 것이요, 맘몬의 힘으로 유지되어 가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만일 자본주의에 젖어 피 묻은 옷, 음행으로 더러워진 옷을 정말 십자가에 죽은 어린 양의 피에 깨끗이 씻는다면 당장에 모든 정치적․경제적인 세력과, 전투 관계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함석헌저작집14, 새 시대의 종교, 한길사, 2009, 48-49쪽)

교회에 대한 관심사, 혹은 종교 일반에 대한 관심사가 줄어들고 있는 판국에 종교 건물을 신축/증축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사고와 신앙적 판단이라 할 수 있을까? 함석헌이 비판하듯이 그 건물은 맘몬이 세워 나가는 것이다. 앞선 종교의 창시자들은 하나같이 맘몬에 대해서 경계하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후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치나 자본과 매우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종교는 그 개념이 암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철저하게 이분법적이다. 부자와 빈자, 천국과 지옥, 내세와 현세, 처사와 악마, 남성과 여성, 백과 흑, 행복과 불행...... 자본주의적 종교는 말한다. “천국에 가고자 하는가? 지금 행복하려고 하지 말고 나중에 죽고 나서 행복하라. 지금은 맘몬의 종교를 섬길 때니 자본의 노예, 교리의 노예, 건물의 노예로 섬기면 내세는 보상을 받으리니.” 이것들은 노예의 도덕, 노예의 종교를 말함이 아니던가.


 
한국의 그리스도교 안에 무속적 신앙이 내재해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가 어렵다. 특히 유동식 교수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한국사회는 유교적이면서 아폴론적인 존재, 이성, 합리, 절제, 질서를 중시하는 세계였다면, 무교는 반대로 디오니소스적인 생성, 열정, 도취, 황홀경, 자유 등을 갈구하는 세계(유동식,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352-353쪽)라는 것이 교회를 가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종국에는 이 둘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지론이기도 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반드시 병리적 현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너무 디오니소스적인 신앙으로 일관하여 사람들의 행복이 마치 내세에 있는 것으로 확신하게 만들면서 이성을 마비시켜버렸다. 그러나 정작 진정으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심취한다는 것은 내세의 술에 취해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지금)의 삶, 현재의 사랑, 현재의 생명, 현재의 자연, 현재의 몸, 현재의 행복을 만끽하라는 것이 아닐까.



*위 이미지들은 인터넷 daum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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