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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종교생활 행복하십니까?

by anarchopists 2019. 11. 25.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2/02/04 05:00]에 발행한 글입니다.

함석헌과 러셀, 종교적 행복의 근본자리를 묻다!


 

왜 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것일까? 종교를 있다는 자체가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묻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물음이 발생한 삶터의 상황(맥락)과 세계의 사태가 분명히 존재하기에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왜”라는 이유를 묻기 전에 “왜”가 처해 있는 근본자리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물음을 갖는 그 근본자리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왜라는 의문이 생긴다. “왜”는 인간의 현실과 이상, 혹은 사태의 원인과 결과가 맞대응하지 못할 때 묻는 인간 실존의 의문이다. 어쩌면 “왜”라고 묻는 것은 인간 고유성의 확인이자 세계-내-존재의 유한성이 갖고 있는 필연적 물음이다. 오늘날 “왜”의 물음의 자리는 바로 “종교와 행복”이 서로 부유스레한 현실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인간에게 행복한 삶을 가져다준다는 통념이 자리하고 있다. 설령 그것이 정신적인 행복이든 아니면 자신의 종교를 잘 신봉한 데서 빚어진 물질적인 행복이든 그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저마다 크다 할 것이다. 나아가서 그 행복이 내세에 주어지는 궁극의 자리라고 할지라도 종교적 인간이 추구하는 마음은 모두 다 행복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왜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한가? 앞에서 말했다시피 종교가 종교로서 가져야 하는 근본적 지향성이 무너진다는 것, 다시 말해서 종교에 대해서 가졌던 기대치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가 종교답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물질적 보상으로서 주어지는 행복과는 더 이상 거리가 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고 자신의 종교를 통해서도 행복을 만끽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이 퇴색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함석헌은 그 근본적인 원인을 다음과 같이 꼬집고 있다.




“근대의 교회 내분은 그 동기가 전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데 있다. 세력 싸움, 재산 싸움 이런 것들이다. 이것은 교회가 정신적으로 자라기를 전연 그만두고 노쇠해가는 증거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른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그중 가장 젊다는 기독교에서도 그 기성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생명력이 쇠퇴한 것으로 본다. 현 교회 이대로는 아마 당면한 세계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함석헌저작집, 새 시대의 종교, 한길사, 2009, 51쪽)


이러한 종교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보면 함석헌 선생의 생전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알게
해준다. 지금 종교는 전투 중이다. 정신이 쇠퇴해가고 있는 중이다. 조직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같은 종단의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종단과의 갈등과 폭력이 난무하는 종교의 모습에서 정신의 상승은 기대하기 어렵다. 정신적인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종교에게 당면한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무슨 능력을 바라겠는가? 따라서 종래의 신자들은 종교의 종교답지 못한 현상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행복지수가 반감되는 것 또한 피부로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쇠퇴하는 종교, 생명력을 다하는 종교는 갈수록 살아남기 위해서 전투적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종교가 나눠줄 수 있는 근원적인 행복이 발생할 리가 만무하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후반까지 살면서 평화운동을 전개했던 세기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인간의 행복 조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대개 인생의 쇠퇴가 물질적인 재화에 대한 숭배를 조장하고, 물질적 재화에 대한 숭배는 다시 인생의 쇠퇴를 촉진하고, 인생의 쇠퇴 위에서 물질적 재화에 대한 숭배가 번창한다. 돈을 숭배하는 사람은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또는 자신의 직접적인 활동 속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는 행복을 외부 세계에서 뽑아낸 즐거움을 수동적으로 향유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술가나 연인은 열정에 사로잡힌 순간에는 돈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의 욕구는 특별한 것이고 자신이 창조할 수 있는 대상만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돈을 숭배하는 자들은 예술가 혹은 연인으로서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가 없다... 배금주의는 사람들이 성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잘못된 이론에 근거해서 자신의 본성을 훼손하고 인간의 행복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일들을 극찬하게 만든다. 그것은 아무런 활력이 없는 획일적인 인격과 의도를 조장하고, 삶의 기쁨을 축소시키고, 공동체 전체를 피로감, 좌절감, 환멸감으로 몰아넣는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조장한다.”(버트런드 러셀, 이순희 옮김,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비아북, 2010, 118-119쪽)


 
러셀이 말한 것처럼 종교는 신자들에게 혹은 일반 대중들에게 사회적, 정신적 피로감을 주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좌절감이나 환멸감, 스트레스, 긴장감? 그렇다. 종교는 이미 배금주의에 젖어 있어서 정신적 가치를 상승시키는 자체 동력을 상실하고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돈, 명예, 권력, 지위, 신분 등을 숭배하는 종교로 퇴락되면서 종교의 본질 자체로서의 신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신은 종교의 정신과 영혼의 능력을 가동시켜주는 에너지인데, 종교는 숭배의 대상을 달리하면서 마치 가시적인 모든 인간의 가치를 숭배하고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고 궁극적으로 신이 선물로서 주어진 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 본질과 비본질, 주와 객이 전도된 상황에서 아직까지도 종교 공동체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신을 배반하지 못해서, 아니면 도의적인 책임과 그 공동체에 대한 혈연과도 같은 정 때문에 종교 지도자와 조직체가 부여해주는 행복의 끄나풀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는 명심해야 한다. 물질적 숭배, 돈의 숭배는 종교 자신의 내적인 패배(버트런드 러셀)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적인 충만함과 내면적인 성실성에 입각한 종교는 물질의 숭배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건강하고 건전한 종교일수록 신자들에게 신과의 합일과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나눠줄 것을 종용한다. 그것이야말로 마음이 가난해진 결과로서 주어지는 진정한 종교인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내적인 궁핍으로 허덕이는 종교는 자신의 물량적 성장이 공동체의 영성적 성장인 것처럼 착각하여 외부적 세계를 더 의식하기 마련이다. 물론 종교가 여북하면 그랬겠나 하는 심정적 판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더 이상 종교의 내면적 패배로 인해서 신자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함석헌은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갈망한다. 물론 새로운 종교라고 해서 종교 하나를 또
제조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종교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종교 제조자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행복 제조기처럼 말이다. 행복을 제조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듯이 종교를 제조한다고 해서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종교는 의식적으로 되는 인위의 산물이 아니다.” 새로운 종교는 “기성교회에서 내쫓김을 당하는 태아적인 정신이 현 문화사회에 도전을 함으로 말미암아 생겨나오는 것이다. 인조종교(人造宗敎)는 반드시 망하고야 마는 것은 실지 역사가 보여주는 일이다.”(함석헌저작집14, 새 시대의 종교, 52쪽) 이 말뜻의 의미는 기성종교의 행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의 종교를 추구하는 반항적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그것은 태아적인 정신, 다시 태어나는 정신이 있어야 인간의 불행을 자초하는 종래의 종교를 탈피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만들어내려고 하지 말고 새롭게 태어나는 정신으로 종교가 탈바꿈되어야 한다. 새로운 정신, 맑은 정신을 가진 종교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행복의 지수, 신앙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다. 국가 사회가 아무리 조작적 행복, 인위적인 행복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종교는 행복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말고 사람들에 의해서 태어나고 창조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종교인이라면 종교 공동체의 태아적인 정신으로 온갖 물질적 숭배와 맞서는 데에서 나올 것이요, 일반 대중들에게는 외부적 세계에 매몰되어서 자신의 인생이 쇠퇴하지 않도록 늘 깨어있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행복하려면 종교는 종교의 근본자리를, 사람은 자신의 근본자리를 잃지 않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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