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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이제 우리 농민은 어디로 갈까 .

by anarchopists 2019. 12. 2.
* 함석헌평화포럼 블로그에서 [2011/11/27 06:30]에 발행한 글입니다.


낯선 타자를 만난 슬픈 타자:
함석헌의 신학적 미학과 타자윤리


“저 영원한 님의 가슴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마음을 아름답게 가져야지...... 무한을 안은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지. 어떤 마음이 무한한 마음이냐? 참된 마음이지. 허영심이 적고 추한 마음...... 네 마음속에서 허영심을 버려라...... 영광의 님을 사랑하여 하늘가에 서라”(
함석헌전집 5, 서풍의 노래, 한길사, 1984, 68-69쪽).

지금 우리는 영원한 가슴을 상상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원은 무슨 초월적인 것 혹은 초월적 존재라기보다 유한 세계에 마음을 두지 않는, 그것을 넘어선 실재적 삶의 총체일 것이다. 그러나 영원을 품을 가슴도 그 밭이 되어야 하는데, 가슴도 무거운 숨을 몰아쉬고 있으니, 영원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가슴은 몸-가슴이 아닌 마음-가슴, 무한 가슴이어야 인간일 텐데, 유한에 뿌리박고 살고 있으니 무한 가슴은 애성이가 난 상처만 보듬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함석헌은 무한을 안은 가슴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인간 자신은 끝이 있는 줄 알면서 끝이-없음에 개방하는 용기는 진정 아름다운 것이리라. 그것이 순수하고 참된 마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끝이-없음 혹은 무한을 끌어안은 마음은 허영심과 추한 마음을 버릴 때 참마음이다. 그러나 헛꿈에, 텅 빈-영화로움을 좇는-마음에 눈이 멀어 버린 우리 마음은 수리적 광기(數理的 狂氣), 경제적 광기, 정치적 광기를 분출하는 미치광이가 돼버린다. 이미 빈 마음, 밉살맞은 마음은 그마저 광기의 공간에 힘을 잃고 끝이-없음의 “끝‘의 공간과 시간에서 승화-되기를 기대하지 못한다. 허영심 곧 빈 마음, 텅 비어 있는데도 영화로움을 좇은 마음 그 마음과 추한 마음 곧 밉살맞은 마음은 유한한 세계와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이 결여되어서 무한의 언저리에 삶을 위태롭게 걸쳐 놓은 모습을 쳐다보게 된다. 우리 사회는 유한은 익숙하고 무한은 낯설다. 낯선 유한이 익숙한 무한을 밀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삶은 가볍고, 현실은 이방인처럼 말라 비틀어져버린 나뭇잎처럼 나뒹굴고 있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영광의 님을 사랑하여 하늘가에 서라”고 우리를 종용한다. 영광의 현현(shekhina), 그것은 엠마누엘 레비나스(E. Levinas)가 말하듯이, “신은 강림하는 게 아니라 마치 강림하는 것 같”(Michaël de Saint-Cheron, 김웅권 옮김, 엠마누엘 레비나스와의 대담. 1992-1994, 동문선, 34쪽)은 것이다. 그렇다. 영광의 님은 “마치” 강림하는 것 같은 것이다.마치 그분이 내려오는 듯해야 곰비임비 앞에 나타난다[現前]. 내려오는 것은 영광의 님에 대한 긴장이 사라진다. 긴장이 사라진 쉐키나는 이미 쉐키나가 아니기에 영광의 현전은 무(néant)가 되고 만다. 그러나 영광의 님은 오시는 듯하고 또 오고 있는 존재이다. 바로 레비나스의 언어적 유희에서 감지하게 되는 신과 인간의 관계는 타자의 존재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에서 그의 얼굴 발견은 우리가 신의 음성을 듣는 방식이다”(Michaël de Saint-Cheron, 같은 책, 43쪽).

타자를 사랑함의 방식, 즉 나의 눈에 맺힌 타자의 얼굴 존재는 사랑이고 그 사랑을 받는 이나 사랑을 하는 이는 똑같이 서로의 행위를 통한 신의 동일한 사유이자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Michaël de Saint-Cheron, 같은 39쪽). 그리하여 “하늘가”에 서라는 함석헌의 명령어의 해답은 쉐키나의 현존에서 밝혀진다. 신의 강림이 오고 있는 듯이 기다리는 사람은 타자의 사랑으로 내려옴이 곧 올라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신의 내려옴이 하늘-가로 인간의 올라감이 되는 것이다.

이제 곧 가슴앓이로 고통을 겪어야 할 농부들[약자들]에게 어떤 명령이 위안이 될 것인가? 오히려 낯선 타자의 ‘그것’이 보호받아야 할 타자를 미친 자(manikos), 이방인(xenos) 취급을 할 날을 어찌 묵인할 수 있을까? 우리 정부와 사회, 그리고 기업은 계약(xenia)으로 묶여버린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장소를 가질 수 있도록 절대적 환대를 베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손님이 되고 손님이 주인이 되는 치환의 환대법은 있을 수 없으니 각자를 상대방의 인질(포로)로 만들기 때문이다(J. Derrida, 남수인 옮김, 환대에 대하여, 동문선, 2004, 68-71, 134-135쪽). 그래서 순수미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계의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아름답게 갖는 것, 곧 신에 대한 미적 인식은 유한과 무한의 경계에 서서 타자의 현전을 맞이하고 환대하는 사랑임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설령 무한이 저 멀리 어두운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졌을지라도, 빈 마음과 밉살맞은 마음으로 무화된 우리들은 타자란 곧 신의 목소리이며 신의 사유라는 것을, 다시 저 의식의 끝자락에서 어렴풋이 나풀거리는 손짓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2011/11/27, 김대식).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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