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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하늘이 내뿜는 기운

by anarchopists 2020. 6. 6.

논어, 안연편 2, 3장: 하늘이 내뿜는 기운

 

그리스도인은 하늘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자기 의지나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러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주어진 본능에 충실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성령, 즉 하늘이 인간에게 준 성스러운 기운으로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몸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수양, 혹은 하늘로부터 받은 영과 정신의 움직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비종교인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거룩한 기운을 갖는다고 해서 육체를 폄하하거나 영혼의 잔여물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기운을 갖게 되는 그 최초의 사건은 모든 것을 하늘 기운에 입각해서 해석하고 그 힘으로 교회와 세계를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공동의 이익(utilitatem) 혹은 공동의 행복이라고 표현한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밀란 쿤데라(M. Kundera)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모두 신의 손에 달려 있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이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 신의 손입니다. 인간의 삶의 모든 일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을 모색하고 계획해도 항상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론 정신도 몸도 심한 좌절감과 무력감에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육체와 영혼, 혹은 정신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와의 싸움에서 자신의 기운을 다 소진하며 살아갑니다. 그럴 때 정말 나를 이끌어 주는 신의 손이 간절해집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은 인간에게 각자의 몫, 곧 각 존재자에게 선물(gratiarum)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상의 선물(donationes)입니다. 하늘의 울림과 하늘의 기운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기운으로 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모두 천태만상이나 각 존재자에게 신은 자신이 주고자 하는 바대로 선물을 주었습니다. 신의 선물을 받은 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이웃과 함께 더불어 이익이 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준 각자의 선물을 신의 선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려면, 신의 선물을 통해서 신의 사건인 것처럼 받아들여야 공동의 행복이 발생하면 됩니다.

교회도 그리해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로 서로 섬기는(servus) 존재, 서로 종이 되는 존재로 살아간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공동의 이익, 공동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사적으로만 누린다면 하늘, 곧 신의 마음을 배반하는 일입니다. 선물은 공평하고 충분하게 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신의 권리에 따라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기운을 받으면서 부차적으로 주어진 신의 선물의 진의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궁(仲弓)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서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집 문을 나가서는 큰 손님을 대하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드는 듯이 하며,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도 원망하는 이가 없고, 집안에서도 원망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顏淵>, 2장).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황금률과 함께 ‘~하듯이’ 대하는 것은 온 세상에 편만한 신의 사랑과 기운으로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손님들입니다. 하느님의 손님들이기에 서로 예배하듯이 경건한 삶으로 존중하면서 그 선물을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신의 선물을 받았다는 자각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모두가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할 뿐, 공적인 이익에는 관심이 사그라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바라는 것만 많아지고 신의 은총의 선물들은 풀지 않으니 원망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니 교회조차도 신의 마음과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Gemeinschaft, 공동사회)가 아니라 이익공동체(Gesellschaft, 이익사회)처럼 비춰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거룩한 기운은 영혼과 정신에로의 동경입니다!

 

밀란 쿤데라(M. Kundera)의 말을 좀 빌리면, 그리스도인의 성령강림사건은 새로운 빛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인생의 대열, 신앙의 대열에서 빠져 나간 존재자를 바로 잡고 해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밝고 강렬한 빛의 세계에 눈을 뜹니다. 밝은 빛으로 세계를 바라는 눈이 새롭게 열린다는 것입니다. 신이 하늘 숨을 깊게 토해내면 인간은 그것을 바람으로 인식합니다. 신의 숨결에 따라 생긴 바람과 불의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linguis)로서 소통을 하게 합니다. 신의 숨결이 머무는 곳에는 말이 생기고 말을 하게 되고 말이 소통됩니다. 사람이 신의 숨결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되면 우선 말을 잘 사용하게 됩니다. 종교의 언어가 신의 숨결에 의해서 지배되는 언어인지, 아니면 시정잡배의 언어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신의 숨결을 알아차리고 그 사건으로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존재자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말본새가 다릅니다.

신의 숨결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신의 말을 동경합니다. 신의 숨결의 근원지를 향해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자신의 말로서 승화시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각기 다른 언어, 서로 통용되지 않은 불통의 언어로 말을 하고 있으니 소통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언어가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신의 언어라는 생각이 있어야 말을 신중하게 합니다. 신의 숨결로 호흡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신의 거룩한 언어가 나옵니다. 바람결에 그냥 스치는 언어가 아닙니다. 불로 태워서 사라지는 언어가 아닙니다. 말은 입소리를 통하여 타인에게 전달될 때, 그 음파에 의해서 뜻이 읽힙니다. 말의 입소리는 신의 근저에 도달하려는 신앙의 이법과 이치의 수단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입소리는 술 취한(ebrii) 듯이, 만취한 듯이 신의 숨결에 흠뻑 젖어서 내는 소리가 필요합니다.

값싼 언어만이 난무하여 소리가 큽니다. 입소리나 말, 언어는 정교하지 못한 신앙언어라 값싸게 취급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와 같은 언어는 안팎으로 소통이 안 됩니다. 언어를 통해서 무한히 신을 향한 동경이 싹터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의 숨결에 근거한 듯한 언어가 생산되지 못하는 교회 공동체의 민낯입니다. 신앙인이 거룩한 영, 거룩한 기운에 사로잡혀 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언어의 사용입니다. 언어의 사용을 통해서 신의 숨결을 현실적으로 보이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신의 숨결에 의해서 거룩하고 소통적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를 부르도록(invocaverit) 하는 매체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부르는 언어로서의 기능은 욕망이나 욕심의 언어가 아닙니다. 유아적인 언어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숨결을 받고 인식한 사람들이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의 방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어는 신에게로의 상승입니다. 그리스도의 말, 언어, 입소리가 단순한 기호나 부호가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신의 숨결은 다시 신의 숨결로 나아가기 위해서 신의 무상적 증여물로서 신과 인간의 소통매체, 인간과 인간의 마음소통매체입니다. 따라서 말(로고스)은 인간의 신앙적 표현의 수단이자 고백의 매체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룩한 하느님의 영이 인간에게 바람과 불의 형상으로 내보일 때, 입에서 나오는 소리의 결이, 말의 결이 새롭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공자는 “인한 사람은 말하는 것을 조심한다. 실천하는 것이 어려우니, 말하는 데 조심함이 없을 수 있겠느냐?”(<顏淵>, 3장)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도 새겨야 할 말입니다.

성서는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omnis quicumque invocaverit nomen Domini, salvus erit)고 말합니다. 부름이 구원과 연결된다는 것은 어쩌면 신과 매우 친밀한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방증입니다. 신앙인의 언어는 거룩한 숨결을 준 존재를 향한 동경을 가능하게 하고, 그 존재에게로 무한히 나아가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것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고, 서로 잘 소통하라고 주었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고린 12,4-13; 사도 2,1-21)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청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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