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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초월자의 현실성(Wirklichkeit)

by anarchopists 2020. 5. 18.

초월자의 현실성(Wirklichkeit)

 

신은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 활동·작용하십니다!(wirken)

 

하느님은 인간에게 온갖 일을 규정하는 현실성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다 지킬 수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존재인 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한 삶 역시 그것을 구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자 사실입니다. 탁월한 독일신학자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주장을 빌려서 말한다면, 선한 삶의 완전한 구현은 선 그 자체가 애초에 신에게 주어진 신적 현실성임을 인정하고 다만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적 삶이 중요합니다. 선을 행하는 데 열정적으로 경쟁하듯이(boni aemulatores) 하려는 신앙적 의지가 칭찬받을 만하다 할 것입니다.

선(bonum, Gute)은 그야말로 좋음, 아름다움[美]입니다. 우리는 항상 선을 악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선의 반대 개념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등장하는 불선(不善)일 수 있습니다. 선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이라 할까요? 이와 달리 ‘악’(惡, malefacientes, Übel; Böse)은 ‘오’로도 읽히니까 ‘싫어하다’는 말로 바꾸어도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 안에 하느님이 선을 행하도록 작용한다는 것은 달리 하느님은 물론 인간이 느낄 때 좋고 아름다운 것을 수행하도록 한다고 풀이 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선을 행할 가능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서 불선이 아니라 선의 지향성을 갖게 된다면, 세계와 인간, 그리고 모든 관계들이 좋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공자는 “나는 아직 덕(德)을 좋아하기를 아름다운 여인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子曰 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 <子罕>, 17장)고 말합니다. 공자에게 있어 덕을 좋아하는 것, 그것이 군자의 도리이자 목적입니다. 공자는 덕을 좋아하는 것을 미인을 좋아하듯이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좋아하고 흠모하기 마련입니다. 그처럼 덕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덕 중에서는 ‘입말’을 신중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더라도 그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좋은 말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은 결국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매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정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면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희망(spe)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결단코 강제하거나 강압적으로 말하지 말고 부드럽고(mansuetudine)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라틴어 mansuetudine가 암시하듯이 군주에게 아부를 떠는 듯이 그렇게 양순하고 온순하게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확신에 차서 비종교인들에게 자신의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부덕한 말과 폭력적인 입말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덕스러운 말은 덕스러운 신앙행동에 근거해야 호소력이 있습니다. 좋은 말은 훌륭한 신앙적 행위가 동반되어야 다른 사람들에게 흡수가 됩니다. 『논어』의 <태백편>(<泰伯篇>) 4장에서 증자(曾子)는 이렇게 말합니다. “새가 죽으려 할 때면 그 울음소리가 슬퍼지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면 그 말이 선해집니다. 군자가 귀하게 여기는 도가 셋 있으니, 몸을 움직일 때는 사나움과 거만함을 멀리하고, 안색을 바로잡아 신의에 가까워지도록 하며, 말을 할 때는 천박하고 도리에 어긋남을 멀리해야 합니다”[曾子言曰 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 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倍矣: 鄙(천박하다, 촌스럽다 비)]. 이를 보면 사람은 몸짓말도 주의를 해야 하거니와 입말을 사용할 때는 더욱이 독언(毒言)이나 독설(毒舌), 혹은 험구(險口)를 삼가고 조심해야(timore) 합니다. 그렇다고 선어(善語), 즉 말을 잘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예법에 맞게 호언(好言 혹은 好語)를 사용하여 덕스러움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현실성을 나타내는 지표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기에 말입니다.

 

신의 현실성의 또 다른 현현은 양심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어떻게 일하고(wirken, 작용) 계시는가를 알 수 있는 본질은 ‘양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에 하느님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계시는가, 하느님이 어떻게 현실화되는가를 알게 해 주는 지표 중 입말 사용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앞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입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분명한 정체성, 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하느님의 실재는 바로 양심입니다. 훌륭하고 좋은 양심(conscientiam habentes bonam)이란 나로 인해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내 자아가 자각되어 일어난 윤리적 감각(conscientiam), 윤리적 의식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자 더불어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실재를 인식할 수 있는 ‘하느님의 자기 공지’(公知, 사람들에게 널리 알림)이며 공지(共知, 여럿이 더불어 앎; cum+scientia)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입말과 몸짓말을 사용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재가(conscientiam)를 받는 듯이 해야 합니다. 부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아니 그만큼 나의 입말과 몸짓말을 사용할 때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하느님의 동의와 수락을 받는다는 그분의 현존의식을 갖고 행동한다면, 그것이 좋은 양심이 됩니다. 거기에는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세속의 계산적 이해와 성스러운 이치가 충돌을 일으키기에 그렇습니다.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어떤 초월적·내재적 실재에 대한 의식에 따라서 살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때론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오해도 받을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실재가 내 안에 있고, 그것을 항상 인식하며 산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세속은 그것을 멀리하고 싶어서,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실재를 거부하고 싶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 자신도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인식, 지극한 윤리적 감각에 따라 삶을 살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그 확신과 의식(conscientiam)으로 자신의 삶을 밀어 넣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그는 죄, 혹은 죄의식(conscientiam)에 사로잡혀서 삶을 올바로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많은 존재자들을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실재를 노출시켰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였기에 거부당했습니다. 고통을 겪었습니다.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하느님의 신적 현실성이 우리의 현실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신적 현실성을 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적 현실성을 현실화하는 데에는 의지가 나약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합리화는 세속의 이치에 대한 타협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신적 현실성을 위해서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삶의 요소들에 신적 현실성이 스며들어가야 한다는 일념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부활을 낳게 했습니다. 그는 신적 현실성, 철저한 윤리적 감각과 반성적 의식을 가지고 살 때에 비로소 나 자신도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인류에게 깨우쳤습니다. 그것이 고대영어에서 기원한 gospel(god+spel=좋은 소식, 기쁜 소식) 곧 구원이요 해방의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실재를 경험하고 그 실재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수가 열어놓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세례(baptisma)를 통해서 입문하게 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처럼 깨끗한 양심, 하느님의 실재를 늘 인식하면서 궁극적으로 윤리적 의식을 실천하겠다는 예수와 같은 의지에의 동의와 참여입니다. 입말뿐만 아니라 몸짓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모습에서 하느님이 나타나도록 하겠다는 신적 현실성으로의 동참입니다. 설령 우리의 신적 현실성이 끊임없는 과정일지라도, 이제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어떠한 양심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하느님의 실재와 그분의 현실성과 삶의 부활, 생명의 부활, 부활의 희망과 연동되고 있음을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입니다.

(1베드 2,13-22)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정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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