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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평화연구소/김대식의 영성\철학과 함석헌식의 해석학적 설교(강론)

고난 속의 유혹

by anarchopists 2020. 5. 25.

고난 속의 유혹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인간의 보편적 일상의 삶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시련이나 고난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일상이 그렇습니다. 그로인해 지치고 힘들기도 하고 삶이 더 버거워지면 극단적인 자기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고난과 시련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유혹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일상이 말 그대로 일상인 것은, 즐거움과 기쁨처럼 고난과 시련 또한 일상의 일부분임을 지칭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일상을 단순히 일상으로 보지 않고 고통, 고난, 시련과 같은 부정적인 상황들에 대해서는 피하려고 합니다. 비일상적 사건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신을 모든 사건의 주체로 인정하며 고백 공동체인 종교 집단이나 종교인조차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상이 주어졌으면 그 일상을 행복하게 누리도록 하면 되는 것을 왜 비일상의 고난과 시련을 허락했는가, 에 대해 항변을 합니다. 오죽하면 『실낙원』을 썼던 존 밀턴(John Milton)이 인간을 흙으로 빚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느냐, 누가 지키기도 어려운 규율을 달라고 했느냐, 누가 구하지도 않은 선(善)을 달라고 했느냐, 하며 초월적 존재에게 따졌을까요?

신앙, 곧 종교는 인간에게 고난과 시련이 따를 때는 다 의미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자기 확인입니다. 고난과 시련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것은 내 일상이 아니라 비일상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이미 일상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신앙고백은 인간 자신의 모든 고난과 시련이 일상이요 삶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고난과 시련을 예수가 경험했던 차원과 비교를 합니다. 인간의 고난과 시련은 결국 예수가 앞서 경험한 삶의 경험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일상에서 고난과 시련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상의 작은 사건이든 큰 사건이든 궁극적으로 예수는 인간의 삶의 죄책을 위해서 그 고난(passionibus)과 시련을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여 승화시킨 인류의 대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의 고난과 시련은 그리스도가 경험한 승화된 일상으로 편입하는 것입니다.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가 경험한 일상과 맞닿은 고난과 시련을 동일하게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적 일상이 다른 비종교인의 일상과 다른 지점은 바로 여기서 드러납니다. 비종교인의 일상은 자신의 고난과 시련의 경험이 비일상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은 과거 그리스도의 고난과 시련의 사건이 전범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자신에게도 생소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종교적인 신앙고백을 언어로만이 아니라 행위로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입니다. 달리 비종교인의 시선으로 볼 때는 비일상적인 경험적 사건이 종교인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지평과 시선이 다르다는 데에 비일상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과 시련은 바로 그 해석학적 의미, 곧 신앙을 고백으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조차도 자칫하면 의미가 없는 비일상적 사건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고난과 시련이 갖고 있는 인간을 향한 유혹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공동체에 서신을 보낸 익명의 발신자는 고난과 시련을 당한다고 해서 수선을 떨지 말라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contingat), 라고 권고합니다. 사람이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 어쩔 줄 모르는 게 정상입니다. 극복하기가 힘들고 주저앉을 것 같은 좌절감을 동반합니다. 거기에 인간의 상상이 더해집니다. 고난과 시련을 경험하게 되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상상을 통하여 미래를 예단합니다. 고통이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유명한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는 ‘상상보다 더 강한 것은 습관’이라고 말합니다. 고난과 시련의 일상을 가중시키거나 경감시키는 것도 상상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보다 더 잘 이겨낼 수 있는 신앙적 습관 혹은 고백의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communicatis Christi passionibus)는 고백의 습관이 더 강력한 무기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비종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종교인까지도 일상을 멈추게 하려고 합니다. 그 강력한 힘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부산을 떨고 수선을 피는 것도 나아가 회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것이 고난과 시련이 인간의 일상을 파괴하려고 하는 유혹입니다. 따라서 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나누고 공동으로 향유(communicatis)해야 합니다. 그것도 기쁨으로(gaudete; gaudeo) 말입니다.

 

고난은 인간 자신을 돌아보는 신앙적 자기 확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고난과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신앙적 확인입니다. 달리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소설 『아우라』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외롭기를 원하지요. 신성함에 다다르기 위해 고독이 필요하다면서 말이지요. 고독 속에 있을 때 유혹이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모르면서 하는 말이에요.” 그리스도인의 일상 안에 비일상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을 살고 있으면서 초월을 지향합니다. 이것은 신성함, 곧 성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한 고백적 습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듯이 거기에 유혹이 찾아옵니다. 성스러움을 지향하는 고독은 벗어나기 어려운 신앙적 행위입니다. 그만큼 고난과 시련이 크게 다가옵니다.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의 성스러움을 찾는 투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고통과 시련, 심지어 모욕까지도 감내해야 합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자발적 고독에 자기 자신을 맡긴 예수처럼, 고독은 현실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종교인의 실존적 자기 방기(放棄)입니다. 인간이 고난과 시련을 일상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신앙의 확인으로까지 인정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 머물러(requiescit)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궁극적으로 성스러움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전범으로 보여준 모욕과 고난과 시련을 함께 경험할 때, 성령은 그와 같은 모든 사건들을 잠잠하게 하고 조용하게 하며 멈추게 합니다(requiescit), 따라서 그저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하느님게 맡기면 됩니다. 근심과 걱정을 하느님 앞에 던져서 없애면 그분이 인간의 근심과 걱정, 고난과 시련, 모욕에 관심을 기울이고(cura), 마음을 쓰면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단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Sobrii estote, vigilate). 술을 마시지 않은 것(Sobrii)처럼, 동시에 잠들지 않은 듯이(vigilate) 그렇게 신앙의 습관을 길들여야 합니다. 성스러움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고독, 근심, 걱정, 고난, 시련, 모욕과 같은 온갖 현재의 일상적 경험들이 훌륭한 신앙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어라, 라는 뉘앙스를 동양철학서 『논어』에 나오는 표현으로 바꿔 보면, ‘극기복례’(克己復禮)입니다. 공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만이라도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 귀의할 것이다. 인을 실천하는 것이야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달린 것이겠느냐?”(子曰 克己復禮 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爲 爲仁由己 而由人好哉. <顏淵>, 1장) 이것을 사쿠 야스시(佐久協)은 “사사로운 욕심(사리사욕)을 이기고 공공의 복지[禮]에 기여하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좋은 해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 시련, 걱정, 근심, 모욕은 모두 잠시 잠깐(modicum)입니다. 일순간(Augenblick)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품 안에서는 일상의 과정들은 금방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의 고난을 비롯한 비일상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모든 불선(不善)의 경험은 그저 나 자신만을 위한 안일한 행복과 안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는 일상적 사건입니다. 자기 몸, 즉 내게 다가오는 모든 일상적 경험을 이기고 온 세상을 구원과 평화,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한 자신의 사적 욕심에 대한 극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처럼 인류의 공영공존(共榮共存)을 위해서 자기를 단속하여 지극한 일상을 초월적 비일상으로 승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일상의 잠시 잠깐의 고난을 비롯한 모든 사건들은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인류의 공공의 복지를 위함과 동시에 인류의 고난을 넘어서기 위해서, 나를 통한 하느님, 혹은 그리스도의 자기 전달, 자기 몸의 나눔, 자기 소통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자기 확인, 그리스도 자신의 자기 확인이 고난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qui vocavit vos in aeternam suam gloriam in Christo Iesu).

(1베드 4,12-14; 5,6-11)

김대식_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대학 강사,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청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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